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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에 대하여

워싱턴 디씨의 트레일

by Claireyoonlee

걷기는 나를 구원하는 도구다. 머리가 아플 때 진통제보다 나은 약이다.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로 괴로워도 바람을 쐬며 물길을 바라보거나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 위로가 된다. 버지니아에 가기 전 대전에 살때는 갑천 변 길을 걷거나, 계룡산 동학사까지 올라갔다. 사람이 다니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혹은 걸어 다니라고 일부러 만드는 길인 ‘트레일’이라는 단어는 버지니아에서 처음 알았다. 그 단어를 알려주고 직접 데리고 다닌 선배가 있었다.


그녀는 공무원 부인이었다. 외교관 남편을 따라 어느 나라에든 도착하면, 지도를 펴 놓고 ‘트레일’을 연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서 혹은 다른 공무원 부인을 불러 같이 걸었다. 워싱턴 디씨에 와서도 그녀는 트레일을 공부하고 사람을 불러 같이 걸었다. 나는 그녀의 지인이 초대한 여자 중 하나였다. 불편한 신발에 핸드백을 메고 사교 생활하듯 나타나지 않고,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은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 후로 그녀는 걷기 좋아하는 나를 자주 불렀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할 얘기가 많아 걸으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나이가 좀 많기도 하지만,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쌓은 삶의 지혜가 무궁무진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탄했다. 그녀가 열심히 찾아낸 ‘트레일’을 걷고 나면 그녀의 커다란 이층집의 '다이닝룸'에서 잔치 국수를 먹었다. 가끔은 특별히 산적 같은 일품요리와 맥주를 마셨다. 국수 한 그릇도 고급 식당에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게 하는 상차림이었다. 서양 사람처럼 키가 쭉쭉 뻗은 나무가 빼곡한 숲의 공기를 가슴 가득히 채우고 와서 차려주는 집밥을 먹으면 사춘기 아들 엄마의 지친 가슴이 뜨뜻해졌다.


그녀가 알려준 트레일은 나도 잘 써먹었다. 미국에 막 도착해 어리둥절한 교우를 성당에서 만나면 같이 걸으러 가자고 했다. 선배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차를 같이 타고 가서, 한두 시간 걷고 도시락을 먹었다. 트레일은 카페나 자판기조차 없이 자연 그대로라 물과 간식, 도시락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누구나 도시 한가운데 있는 호젓한 산책길을 좋아했다. 그렇게 걸으면서 이야기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친해졌다. 오솔길을 냈을 뿐 거의 손대지 않은 숲에서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순수함을 되찾고 마음을 열었다.


C&O(Chesapeake & Ohio Canal) 운하는 화물을 운송하기 위하여 거의 200년 전(1850년)에 생겼다. 이름에 오하이오가 들어있어 이 길이 오하이오까지 가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워싱턴 디씨 조지타운에서 시작해서 메릴랜드주 컴벌랜드까지 약 297km 이어진다. 예전에는 노새가 운하 옆의 토우패스(towpath)로 배를 끌었는데 이제 그 길이 트레일이 되었다. 포토맥강 지류의 넓고 좁은 폭의 물길을 따라 나무와 풀이 제멋대로 자라서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물씬 난다. 거울같이 맑고 잔잔한 수면에 나무나 건물이 비추어 데칼코마니 같았다. 눈이 많이 와서 동물 발자국도 나지 않은 눈길을 걸은 적도 있다. 가끔 지나가는 자전거가 “On your left”하고 소리치면 우리는 오른쪽으로 피해 걸었다. 걷는 사람이 드물지만,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살짝 인사하고, 날씨가 골져스하다는 등의 소소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기도 한다. 주차장으로 돌아와야 해서 아주 멀리 가보지는 못해 늘 아쉬워하면서 언젠가 한 번 이 길을 완주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길의 중간 중간에는 운하를 관리하는 사람이 살았던 벽돌집이나 물레방아가 있다. 운하를 따라 화물을 운반하던 작은 배와 노새, 이를 관리하는 ‘공무원’과 그 가족이 어디선가 툭 하고 나올 것처럼 오래전 그 풍경이다.


C&O 트레일 중 메릴랜드 구간에 제법 험한 billy goat trail 하이킹 코스가 있다. 세 마리 염소 중 영리하고 힘센 막내가 트롤을 물리쳐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는 동화의 주인공처럼 용감하게 큰 바위를 넘어간다. 이 A코스만 빼면 B코스, C코스 모두 어렵지는 않다. 나는 그때까지 그냥 운동화를 신고 다녔는데 A코스를 걸으면서 등산화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 그레이트폴즈(Greatfalls) 폭포가 있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길이 세고 급하다. 산을 넘어가는 무장 공비처럼 논다고 킥킥대며 말하면서 우리는 넓은 바위를 올라가는 산책을 즐겼다.


Capital crescent trail은 워싱턴 디씨에서 메릴랜드 베세스다까지 반달 모양으로 뻗어있다. 아스팔트 길이라서 가볍게 걷다 보면 베세스다 다운타운에 도착한다.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달콤쌉싸름한 원두 향을 풍기는 카페, 베이글 샌드위치를 파는 델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숲을 지나 강을 건너 사람이 사는 동네를 만나면 깊은 숲을 헤매다가 마을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것 같은 작고 오래된 식당에는 사람들이 세상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는다. 그들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먹고 싶지만, 걸어서 돌아갈 길이 멀어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다.


버지니아에 살면서 걷기는 나의 주요 일상이었다. '트레일'에서 나는 마음을 다독이고, 친구와 추억을 쌓고, 건강을 지켰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트레일’이 많이 생겨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오래도록 걸을 수 있다. 그 운치 있는 운하길을 끝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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