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내 이야기

거짓말과 이야기 사이

소설과 영화 최인호《겨울 나그네》

by Claireyoonlee

1970년대에 문학소녀가 읽을거리는 마땅치 않았다. 세계 문학 전집의 서양 고전은 번역이 조악했고,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열 살 갓 넘은 중학생의 필독서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같은 사실주의 심리소설이었다. 나는 그런 책들을 이해하는 척하며 지적 허영심을 채웠지만, 늘 책에 목말랐다. 신문 연재 소설은 십 대 소녀의 갈망을 매일 조금씩 해소해 주었다. 동시대의 유명 작가들이 쓴 이야기에서 성인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었고, 날마다 조금씩 음미하면서 다음 회를 기다리는 맛도 있었다. 탐탁지 않아 하는 엄마의 눈을 피해 이불 속에서 읽기도 했다.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는 아주 인기 있는 동아일보 연재 소설이었다.


《겨울 나그네》 “나는 이 신문 연재 소설을 고등학교 때 몰래 읽고 여주인공 ‘다혜’같은 연대 불문과 학생(영화에서는 다혜가 첼로 전공이었다)이 되기로 결심했다. 불어를 좋아해서 불문과가 목표였고, 이왕이면 멋진 비련의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가끔 부모님 몰래 통속 소설을 읽는 일탈(?)을 했지만, 공부만 몰두했고 덕분에 나는 꿈을 이루었다.” 무슨 대학, 무슨 과를 선택한 이유를 나는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최근에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겨울 나그네》는 1983년부터 1984년까지 그러니까 내가 대학 입학한 후에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었다. 고등학생일 때 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연세대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나를 속인 기억의 오류가 무엇인가 꼽아보았다. 최인호 작가와 동문이자 친구인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그에 관련한 일화를 자주 들려주었다. 작가의 딸 이름이 ‘다혜’이고 스승인 황순원 선생님이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그 당시 연예인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던 작가에 대한 소소한 뒷담화는 어린 여학생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슨 소설인지 모르지만, 언젠가 신문 소설을 엄마 몰래 읽은 적이 있다. 소설 여주인공이 나와 같은 학교 같은 과였다. 별거 아닌 일에 감성에 빠지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을 나이였으니 황당한 거짓말을 지어낼 만하지 않은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최면이 걸려 진실이라고 믿는다. 세간에 유명했던 거짓으로 학력을 부풀린 여자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고 그녀의 눈이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맑고 투명해서 놀란 적이 있다. 의도치 않게 거짓말하고 다녔던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만은 없어 쓴웃음이 났다.


기억은 이렇게 믿을 수 없고, 단편적이며 이기적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저장해서 상처받지 않게 한다. 아름답고 유용한 부분은 더욱 진하게, 아픔과 고통은 슬쩍 감춘다. 어찌할 수 없는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이야기꾼은 자신들이 믿는 혹은 좋아하는 진실과 그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짜낸다. 작가의 세계와 거짓말쟁이의 세계는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아리송한 경계가 있다.


그때는 재미있고 세련되었던 소설은 다시 보니 낯설고 진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나던 ‘연애의 정석’이었다. 집 전화나 편지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에 연애를 하면 부모님의 검열이 심했다. 집으로 전화가 오거나 편지가 오면 누구냐고 추궁을 당했다. 맘에 없는 상대가 편지를 보내면 받은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연애를 시작하려면 남학생들이 집을 찾아오거나 학교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여학생이 먼저 사귀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관심 있는 여학생에게는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에 학보를 보냈다. 그래서 인기가 많은 여학생의 우편함은 각 대학에서 온 학보로 가득 찼다. 학교 교정은 메케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늘 산산한 기대감과 분홍빛 설렘으로 생기가 돌았다.


소설 속 주인공 남녀는 대학 교정에서 낭만적으로 사랑을 시작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고단한 운명에 스러지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요즘 세련되고 쿨하게 연애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극적 사랑을 그때는 아름답고 눈물겹다고 생각했었다. 안타까운 이별과 만남이 이어지고 남자 주인공의 운명은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여기서 새로운 사랑이 싹트는데 친구의 애인과 결혼하는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구성이 신선하여 함부로 막장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간은 질량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고 한다. 이 어려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해도, 청춘의 고민이 무거워 인생의 무게가 많이 나갔던 젊음의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나이가 들면서 뒤죽박죽된 기억이 본의 아닌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런데 이야기가 꼭 진실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과거의 시간은 다시 쓴 이야기로 아름다운 현재의 시간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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