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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Sep 26. 2019

90년대의 끝자락 여름,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조나 힐 감독의  <미드 90>

 청소년 시절, 나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이러니한 건 다른 사람들도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미드 90>을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성장 영화를 보는 이유는 미처 청산하지 못하고 유예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감정과 사고를 마주하기 위함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유예한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신이 유예한 것들은 무엇일까. 




받아들여진다는 것의 의미가 어느 때보다 각별할 때가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형 이안에게 깔려 두들겨 맞는 스티브의 실루엣에서 화면을 여는 이 영화는 카메라를 줌인해 스티브가 이안의 방에서 평소 그의 행동을 따라 하는 모습을 담는다. 이안에 대해 스티브가 느끼는 애증의 껍질을 벗겨내면 '우상에 대한 갈구'가 있다. 그러나 이안은 스티브가 정성 들여 포장해 선물한 카세트를 보지도 않고 내던질 정도로 그에게 무심하다. 인생의 첫 우상이 자격요건 박탈로 더 이상 우상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상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인 스티브는 감내하지 못한다.  

 스티브의 시선은 이제 가정이 아닌 사회를 향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티브가 전에 없던 방식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티브는 스케이드보드 상점을 아지트 삼아 담배, 파티, 스케이드보드에 미쳐사는 '레이'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한다. 받아들여진다는 것, 몰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 시절의 우리에게 함의하는 바는 크다. 스티브는 이 모든 과정에 기계적으로 흡착된다. 스티브는 자신이 합류하기 전까지 무리에서 막내로 불려왔던 루벤보다 과감해진다. 

 술, 담배도 자주 하고 심지어는 루벤은 엄두조차 못 내던 묘기를 부리다가 머리가 찢어지기도 한다. 일련의 사건들은 스티브에게 묵시적으로 '무리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관계는 스티브가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매준다. 붙들리고 싶었던 그때의 마음을 복기해보면 참 간절한 것이어서 그때의 내가 참 불안하고 유약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개인의 문제 내지 가정의 문제가 심각하게 여겨질수록 그 간절함의 농도는 짙어진다.  

 

우리 모두는 자신 인생의 상처와 사연을 안고 산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가정에 대한 불만과 무리에 대한 헌신이 서로를 양분 삼아 자가증식하는 가운데 스티브의 어머니 데브니는 그를 무리에 데려가 다시는 어울리지 말라며 역정을 낸다. 다음 씬에서 스티브는 차 안에서 데브니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데 이 분노는 다분히 패륜적이다. 모든 성장이 옳을 수는 없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만행을 온정으로 덮어주려는 것이야말로 기만일 것이다. 영화 속 분노를 최고조로 고조시킨 후에 조나 힐 감독은 레이와 스티브의 대화 씬을 통해 스티브가 아닌 모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레이는 "남들의 인생이 어떤지 보면 네 인생하고 바꾸기 싫을 걸"이라고 운을 뗀다. 친동생을 잃은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학대당하는 '루벤', 극악하게 가난한 '4학년', 꿈을 잃고 방황하는 '존나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심지어는 형 이안조차도 스티브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방탕한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며 방치됐던 자신의 과거를 간접적으로 고백한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상처 없는 사람 없다는 익숙한 격언은 영화 속에서 그렇게 발화된다. 

 그 대화의 끝에서 레이는 스티브에게 "옆에 누가 있는 건 정말 좋더라. 가자"라고 말하는데 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이 아이들이 마치 인력처럼 서로를 잡아당기며 버티고 있어왔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척력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레이는 스케이드보드 프로가 되고자 부지런히 노력하지만 존나네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른 채 술과 파티에 빠져 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그건 루벤과 스티브도 마찬가지다. 루벤은 스티브의 등장으로 자신이 소외된 것에 불만을 느끼고 시비를 걸려 한다.


우리의 방황은 이해받을 수는 있지만 결코 아릅답지는 않았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미드 90>은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와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사이 언저리에 있는 것만 같다. 한 소년이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문라이트>와 같다. 그러나 그 조력자들이라는 게 사실은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불과 5살 많은)청소년들일 뿐이며 사소한 오해로 서로에게 흠집을 내려한다는 점에서 <파수꾼>과 같기도 하다. 이 세 작품들의 공통분모는 변명의 측면이 아니라 사실의 측면에서 '그때의 우리는 참 어렸지'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공지영 작가는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주인공인 운동권 대학생의 입을 빌어 "우리의 방황이 이해받을 수는 있지만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청소년 시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의 성장이 그랬듯 그때의 나는 불안정했고 안쓰러웠으며 이기적이었다. 단편적으로 행복한 기억도 있었지만 그때의 나 전체를 아름답다는 미학적 용어로 포장할 자신은 없다. 그때의 나는 변명이 아니라 순전한 사실로서 그저 어릴 뿐이었고 성장에 대한 갈증을 방황으로 해소하고자 하던 철부지였다.

 조나 힐 감독은 영화 속 철부지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는다. 불쑥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불쑥 끝이 난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스티브가 이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지, 레이가 스케이드보드로 성공할지, 존나네가 여전히 술에 절어 살지는 그들 자신의 몫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철부지들에게는 서로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어떻게 서로를 당기고 또 밀어낼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이 철부지들의 이야기는 '4:3 화면 비율', '16mm 영상 필름',  '90년대 미국의 음악' 등의 요소로 더욱 특별해진다. 물론, 우리가 그 시대 미국의 정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표상적으로나마 그 시대를 유영하고 심취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배우가 아닌, 감독 조나 힐의 역량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고. 영화가 끝날 때는 "영화를 만들면서, 마주하기 싫었던 10대의 나를 사랑하게 됐다"는 조나 힐 감독의 말을 조금은 수긍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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