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칼럼 두 편을 연달아 쓰고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오랜 피곤이 누적됐던 탓일까. 오랜 상념이 쌓였던 탓일까. 마냥 으슬으슬 떨리기만 하는 게 몸에 매가리가 없었다. 허락된 것은 무력하게 누워있는 것뿐이었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긴긴 인고의 시간을 나는 3박 4일의 부산국제영화제 여행을 복기하며 보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한참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짧았던 이 여행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작년 이맘때쯤의 부산국제영화제 속 내 모습을 상기해본다. 태풍 '콩레이'가 급상한 탓에 우산이 무색할 정도로 비가 쏟아졌고 신발이며 바지가 질펀하게 젖어왔다.
그 와중에도 노트북 가방을 질끈 메고 나는 이 영화, 저 영화를 보기 위해 해운대며 영화의 전당을 오갔고 영화의 순간들을 부지런히 기록해 기사로 내보냈다. 여행보다는 출장에 가까웠고, relax보다는 stress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삶은 항상 유예돼야 하는 것. 고생한 만큼의 성과가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순수하고도 미련한 진심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 여행은 절친한 형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함께하기로 일정을 우발적으로 변경했다.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궁상맞기가 싫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궁상맞음은 작년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록하되 부담감 갖지 않기로, 시간을 보내되 의무감을 갖지 않기로. 칼럼니스트가 아닌, 영화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서 가고자 했다.
나는 언젠가 대학 동기들과 찾았던 수제 맥주 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펍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깔끔하고 카페 같은 인테리어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하나하나가 취향저격이라 동기들과 아지트 삼기로 한 펍이었다. 즐겨 찾는 페일 라거를 시켰다. 맛과 향 모두에서 레몬 같은 청량감이 느껴지는 산뜻함이 좋다. 머금으니 피곤과 상념도 씻겨 내려가는 기분. 진즉에 찾아와 글을 쓰려했는데 아파서 그러질 못했다. 아무튼 술이 보약이다.
보약 한 모금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정서적, 감정적 짐을 덜어내고 나니 작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이번 숙소 역시, 작년에 묵었던 곳과 같은 숙소로 예약을 했는데 동행한 형이 여행 당일에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정말이지 그곳이 관광지로 유명한 깡통시장, 국제시장 근처인 줄 모르고 있었다. 첫차 타고 들어와서 막차 타고 들어왔던 일정을 감행했던 작년의 내가 그러한 풍경들이 눈에 보였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정을 일치감치 저녁 전에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푸드트럭이며 포장마차에서 이것저것 사 먹다가도 술이 고플 때는 아무 주점에나 들어가 불콰하게 술에 취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날 본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 다뤘던 '수행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궤적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물었다.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영화 부분에서 성과가 없었냐고 물어본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 상영 이후, 이어지는 감독과의 대화에서 (작년과는 다르게) 재수 없는 모범생처럼 질문도 해봤으니 자족한다. 또한,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영화들 중 호기롭게 무작정 선택한 영화에서 우연찮게 좋아하는 영화 기자님과 안면을 트고 명함을 교환하기까지 했으니 수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페일 라거를 다시 머금고 회상을 이어나간다. 중학생 때 이따금씩 <씨네 21>을 읽곤 했는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이정진 씨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 아직도 선하다. '선택은 언제나 의외다 그리고 언제나 새롭다'. 이게 이 여행의 복선이었을까. 그 영화를 선택한 것은 다분히 의외적인 것이었고 기대한 것 이상의 행운을 얻었다. 이 여행에 절친한 형과 함께 하기로 선택한 것은 다분히 의외적인 것이었고 기대한 것 이상의 재미를 얻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지.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때로는 의외의 선택에 나를 맡기고 천천히 그 순간을 유영해봐야지.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런 다짐들을 배웠다. 그나저나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서는 동호회로 보이는 단체 손님들의 술자리가 한창이다. 내가 궁상맞아 보이려나. 별로 신경은 쓰이지는 않는데 글을 쓸 때, 다짐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다소 찜찜하다.
홍상수 감독 영화 같은 궁상맞음은 사양이라 했는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을 제목으로 한 글을 홍상수 감독 영화 주인공처럼 궁상맞게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술 더 떠서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에서 나온 대사로 궁상맞게 길었던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잔에 남은 페일 라거를 전부 마신다. 시간이 지난 탓에 청량감보다는 시큼함이 텁텁하게 남는다. 궁상맞다. 오늘의 혼술예찬 끝.
"좋은 사람 많이 만나고 술 너무 취하지 말고 짧게라도 일기는 매일 쓰기다. 알았지?" <북촌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