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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ve bin Jan 28. 2022

결정장애

한 살 더 먹을수록 선택이 쉬워질 줄 알았다. 선택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기도 하고 선호와 불호의 경계를 가르는 일이다. 무엇이 지금과 미래의 나에게 맞는지 결정하는 일은 고차원의 일이다. 고려할 요소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한 가지의 결정으로 인해 줄줄이 영향을 받는 실타래들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의 타당성(질)과 별개로,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에 근거한 데이터들이 엄청나게 쌓인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뒤통수칠 수도 있구나,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되는구나, 섣불리 ok를 하면 나중에 힘들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 감정이 상하는 건 한순간이구나 등. 이런 데이터들이 쌓이면 내 결정에 힘이 실리고, 확신을 하게 되고, 확신들이 쌓여 편견으로 꽁꽁 무장을 마치면 마침내 꼰대가 된다(꼰대의 탄생).


이는 애초에 선택과 결정이 100% 맞는 (right)이라는 확신을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확률 게임에서 뭐가  낫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수록 100% 맞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정답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방법 중 좋은 것은 데이터에 근거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쌓여가는 데이터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고민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과정이다. 결정의 근거가 되는 베이스가 쌓이면 빠르게 선택(생산성의 업그레이드)할 수 있고,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예전에는 먹어보지 못한 게 많아서 결정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면, 이제는 맛을 골고루 봐봤으니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 딸기맛도 수십개지만 몇 가지의 딸기 맛이 별로였다면 이제 '나는 딸기맛을 좋아하지 않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꽤 합리적인 과정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딸기맛을 맛봐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어른이 될수록 단호해지고 결정이 빨라진다. 물론 어떤 사안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래서 뚜렷한 일색(一色)의 인간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나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예전에는 단호했던 지점들에서조차 망설인다. 왜 반대쪽으로 가는 거지?


예전에는 내 시간에게 무한정인 것처럼 대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일회성 만남들이 많았다. 오늘 만나고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중에 관계를 지금까지 이어온 사람은 소수다. 한 인간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최대치(던바의 수)가 150명이라고 한다. 150도 너무 많이 잡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내내 신기하도록 점심 저녁 약속을 다녔는데 학원, 스터디, 동아리, 술자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20살 후반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진짜 빠르고, 일회성 만남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한낱 가벼운 관계는 의미가 딱히 없었다. 또 여유롭게 이것저것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다 보니 생각한 것보다 이뤄낸 것은 없고, 취미 부자만 되어있을 뿐이었다. 학부 때 알바 하나 제대로 한 적 없는 나였고 그때는 돈이 별로 아쉽지 않았다. 뭐 용돈을 아주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겐 충분했고 용돈을 당당히 요구해도 괜찮은 시절이었으니까.


누군가는 자신감 상승을 처방하더라. 또 다른 이는 29,30은 원래 불안과 후회 그리고 초조함의 나이라고 하더라. 자리가 잡히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도 조언하기도 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깊은 관계가 의미 있고, 시간이 소중하고, 돈이 다는 아니지만 다가 아닌 것도 알게 된 지금, 나는 계속 망설인다. 너무 소중하니까 너무나 망설여진다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고민하고 망설이는 시간과 결정의 질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래도 짧게 바로 내린 결정보다는 고민하고 망설인 시간들이 내 결정에 타당성을 부여하진 않을까? 어떻게 내린 결정인데, 공들인 결정이니까 조금은 더 나은 결정이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내 앞으로의 시간과 관계와 동에 대해 고민하고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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