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롱 Oct 28. 2021

이렇게 행복한데 노잼 작가라니

근황

일주일 내내 엄마로 살지만, 한 주의 두 번은 르 꼬르동 블루라는 프랑스 학교에서 제과를 배운다.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정신없이 샤워를 하고 마드리드 외곽의 고속도로 M40을 쭈욱 밟고 급히 하는 등교. 차에서 내리고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이 하며 트렁크를 열고 절대 미끄러지지 않을 것 같은 투박한 검정 조리화를 신고 펜 두 개를 유니폼 왼쪽 팔에 무심하게 꽂고 얼른 들어간다. 그 이틀의 7시간만큼은 내 미래를 위한 온전한 투자다. 가족들을 위한 모든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내 앞 놓인 버터와 밀가루와 크림과 설탕에 집중하는 시간. 익숙하지 않은 파이핑에 손을 덜덜 떨며 머랭을 짜면서도 싫지 않고 행복한 이유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이제야 할 수 있다는 기쁨과 안도감 덕분이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이 재미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나름 일을 즐겼고, 거대한 조직에서 느끼는 인정 또한 크나큰 성취감을 안겨주었으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 역할 상 큰돈이 오가는 계약 서류도 아니었고 회사 밖에서 볼 수 있는 활자나 그림도 아니었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보고서 한 더미와 누군가의 칭찬만으로 잠시 천국에 갔다 올 수 있다니 나란 인간은 참으로 단순하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기쁨이다. 제과는 결과물을 곧바로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전문가가 아니라도 먹어보고 평할 수 있어서 더 익숙하지만 냉정한 세계다. 셰프는 두 시간 넘는 시간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가차 없이 반으로 잘라본다. 단면을 보면 숨기고 싶은 공정까지 모두 드러난다. 도우는 얇게 잘 밀어 구웠는지, 필링은 질척하지 않게 적당한 수분만 머금었는지, 화려한 겉모양에 현혹되지 않고 속속들이 다 평가받는다. 그래도 좋다. 꿈꾸던 일을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아쉬웠던 영역, 그러니까 손에 잡히는 일을 한다는 만족감을 주는 제과.    


오늘은 목요일. 수업이 없는 날. 학교에 다니지 않던 시절 매일 앉아 글을 썼던 카페를 다시 찾았다. 7시만 넘어도 밝았던 여름이 지났고, 벌써 두툼한 외투를 찾는 계절이 되어서 카페 오픈 시간인 8시에 찾았는데도 아직 밖은 어둑어둑하다. 늘 그렇듯 카페는 텅 비어 있다. (걱정은 말자. 직장인들이 11시만 되면 쏟아져 나와 커피 브레이크를 위해 가득 차고, 2시에는 샐러드를 먹는 손님으로 가득하니까) 익숙한 공간에 앉아 매일 마치는 소이 라테와 세 가지 치즈가 들어있는 미니 샌드위치를 먹는다. 이 향, 이 공기, 냄새. 아직은 낯선 학교와는 달리 참 편안하다. 절대 고향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마드리드지만 매일 아침 같은 말투로 안부를 묻는 바리스타 미리암과 인사를 하고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은 이방인으로 사는 이 도시에서도 상당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오면 2분 만에 달려 도착할 수 있다는 것도 저 멀리 떨어진 학교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안하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본능인 것 같다.


이 주에 한 번은 작가 선생님을 모시고 줌으로 합평반을 한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모두 시간대가 비슷하게 유럽에 사는 4명의 학인들. 글 쓰는 동지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쓴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면 치부가 훤히 드러난다. 마치 셰프가 내 케이크를 커다란 셰프 나이프로 반 가르고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분과 꼭 같다. 지난 합평에서 "마리롱님은 참 진지하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었다. 글을 읽으면 사람이 보이고 취향과 삶에 대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매 순간 정성을 다하고 착실하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도움이 되긴 했지만, 더 나이브하게 생각해보면 재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읽어도 그랬다. 환희를 느끼는 이 순간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학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읽어보면 나의 설렘이 느껴지질 않는다. 서글펐던 난임 일기를 쓸 때보다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 이렇게 행복한데 왜인 걸까? 노잼 작가에서 벗어나고 싶다. 없던 유머 감각을 어디서 살 수도 없고 어쩌나. 


당분간 일기처럼 브런치 글을 쓰려고 한다. 어설프고 너무나 개인사라 안물 안궁이지만 처음부터 너무 정제해서 에세이를 쓰려고 하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아 재미가 없다. 글 쓰는 게 우선 재미가 있어야 글도 재밌는 거 아닐까. 물론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란 말도 있지만 우선 스쳐가는 생각을 메모처럼 남기고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도 밀가루 한 줌 놓치지 않고 싶다. 글 몇 편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과 초급 과정이 반을 향해가고 있다.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니라고!) 수업과 글과 육아 모두 잡으려 하면 욕심이겠지? 우선 마음껏 베이킹을 즐겨보자. 이렇게 배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의 대표 간식은 모래 쿠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