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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Nov 19. 2021

제과 학생의 속사정

마들렌을 구워 떠나야만 했던 그 이유

르 꼬르동 블루의 제과 코스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를 다짐했었다.


하나, 학교 다녀온 날은 꼭 그날의 기록을 남겨야지.

둘, 배운 건 집에서 한번 만들어봐야지.


특히 후자는 온라인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학교 선배가 알려준 팁이었다. 학교에서는 셰프님이 공정을 봐주고 오븐 온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주니 당연히 만드는 제품의 완성도가 높은데 집에서 만들어보면 그대로 안 나온다는 점. 망각 곡선의 법칙은 어디서든 적용되어 셰프 시연을 보고 바로 만들 때는 생생히 모든 과정이 기억나서 그대로 따라 하는데, 분명 그때 그 시간에 부지런히 노트를 적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만들면 디테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며칠 뒤에 만들어보면 촉감도 식감도 맛도 색깔도 아주 조금씩 다르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신선한 고급 재료를 사용한다. 집에서 모든 재료를 같은 수준으로 준비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헤이즐넛 프랄린처럼 쉽게 구하기 어려워서 아직 사지도 못한 재료도 있다. 비싼 재료인 진짜 바닐라빈을 슈퍼에서 사면 한 줄기에 3유로 꼴이라 연습 때는 쓸까 말까 고민하며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재료가 완벽하게 준비되지 못했다는 핑계로 자꾸 복습을 미루게 된다. 게으른 천성이 어디 가지 않는다.


보통 학교에서 실습을 하면 두, 세 가지 종류의 과자나 케이크를 동시에 만든다. 하나를 다 끝내고 다음 걸 하면 그나마 헷갈리지 않을 텐데 한 가지만 만드는 빵집은 없으니 그건 불가능하다. 믹서를 돌려두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 밀가루 반죽을 휴지 하는 시간, 뜨거운 크림을 식히는 시간, 오븐에서 굽는 시간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짬을 이용해서 각각의 순서를 진행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공정이라도 놓치면 다음 순서가 엉망이 된다는 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하나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뿐인가. 2시간의 과정 중 셰프가 눈을 부릅뜨고 한 명 한 명의 공정을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외친다.


"검사시간 30분 전!"

"10분 남았다! 빨리빨리 서둘러"


알기 싫어도 끊임없이 알려주는 셰프. 아주 좋아했던 티비 프로그램이었던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진들의 긴장이 바로 이런 거였을까? 프로라는 그분들도 녹화 전날이면 잠을 설칠 만큼 심장이 떨렸을까?


그렇게 긴장하며 지내다 보니 역류성 식도염이 도졌다. 올라오는 위산에 찌릿찌릿 불타는 듯한 가슴. 밤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기침. 어렵게 청한 잠도 깨워버리는 호탕한 기침이라 밤에 자는 듯 말 듯 한 그 기분에 피로가 영 풀리지 않는다. 병원 예약은 제일 빠른 날짜가 12월 30일이다. 이런. 급한 대로 한국에서 고이고이 가져온 양배추즙을 아침 공복에 마셨고, 끼니마다 양배추를 우걱우걱 챙겨 먹는 중이다. 처방이 없으면 약을 주기 어렵다는 동네 약국에서는 너무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해서 겨우겨우 한 달치 약을 받았다. 소중하게 한 알씩 먹어가며 그렇게 수업에 다니고 있다. 학교를 다닌답시고 이른 새벽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수업을 다 마치고 3시쯤 첫끼를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잠에서 잘 깨지 않는다고 빈속에 강렬한 커피를 들이부었으니 빨갛고 연약한 위를 가진 내게는 쥐약이었을 터. 증상이 더 심해져서는 수업시간에 따발총 같은 기침을 쏟아냈고,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꿈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이유로 내가 제과 코스를 시작하고 보니 집에 빈 구멍이 너무도 많았다. 집안이 늘 어수선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은 등원을 거부하고 신랑도 아이들에게 옮아 자꾸만 아프고 온 가족이 시름시름 앓았다. 원인불명의 장염에 시달려서 힘들게 만들어온 쿠키를 못 먹기 일쑤였고. 장식용 빵만 늘어가고 있었다. 케이크라면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도 이젠 지겨워했고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쌀이 좋은지 밥순이가 되었다.


어떻게 든 숨 쉴 구멍은 있다고 반가운 연휴 소식이다. 잔뜩 남은 신랑의 휴가 소진 소식. 일주일을 고스란히 행복한 가족의 시간으로 보내기로 했으니 평소와 다른 특별한 7일. 돌이켜보니 올해 우린 여름휴가도 없었다. 집에 있으면 일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급히 짐을 싸서 떠나기로 했다. 늘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 식구의 세끼 식사를 차리는 것도 일이지만, 심심하다는 아이들의 새로운 놀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고, 쌓여있는 소소한 집안 일도 생각날 테고, 오븐을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며 연습 안 하는 죄책감에 시달릴 테니까. 그러니 우선은 떠나는 거다. 마드리드에서 보기 힘든 강과 바다가 있는 포르투. 둥이가 생전 보지 못한 이국적인 풍경도 보고. 새로운 먹거리도 발견하는 시간. 상상만 해도 설렌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기쁨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 그것은 바로 일탈. 몰두하다 탈이 났으니 한 발자국 벌리 떨어져 재정비 시간을 갖는 거다.


자동차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학교에서 배운 여행용 빵이 생각났다. 빵이라고 하긴 그렇고 케이크인가? 바로 조개 모양의 구움 과자 마들렌(Madeleine).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의 꼬메르씨(Commercy)라는 마을의 전통 케이크다. 18세기 중반부터 먹어온 케이크라고 하니 이것 또한 역사가 깊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파리와 잘츠부르크를 오가는 기차가 코메르시의 기차역에 정차했다고 한다. 그때 바구니 가득 마들렌을 담아 팔러 나온 여인들이 소란스럽게 호객행위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어서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진풍경. 작고 귀여운 조개 모양이고 파운드케이크 보다 훨씬 촉촉하고 부드러운 맛이라 프랑스 아이들의 오후 간식 시간(구떼-le gouter)의 대표 메뉴 이기도 하다.


가장 쉽게 구울 수 있는 메뉴이기도 하니 나도 금방 한판을 구웠다. 가장 클래식한 12개 판으로 말이다. 조개 모양 몰드에 말랑해진 실온의 버터를 정성스레 두 번 발라주고 밀가루를 뿌리고 털어낸 후에 냉장고에 넣어둔다. 버터는 약간 태워서 헤이즐넛 버터로 만들어야 한다. 이름은 그렇지만 진짜 헤이즐넛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버터를 끓여서 120도 이상 올라가면 타닥타닥 장작 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버터 안에 들어있는 단백질의 성질이 변하며 헤이즐넛 향이 솔솔 나고 황금빛 나는 액체 버터로 변신하니 그렇게 불린다. 밀가루, 계란, 설탕, 레몬 제스트, 버터로 만드는 단순한 레시피지만 근사한 느낌을 선사해주는 것은 이 버터와 조개 모양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학교 레시피로 뭐라도 하나 구웠다는 안도감일까. 마들렌을 챙겨 차로 내려가는데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여행길 우리 가족의 출출한 배를 달래줄 작은 조개들. 락앤락 통을 여니 버터리한 레몬향이 솔솔 난다. 하나씩 잡고 오물오물. 이게 바로 행복이지! 촉촉함이 잘 퍼진 부드러운 케이크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사이드 미러로 뒤를 슬쩍 보니 아기들도 냠냠냠. 먹느라 정신없는 모습을 보니 좋은 레시피를 배우는 보람이 절로 느껴진다. 마들렌을 마지막으로 일주일간 나의 오븐은 문을 닫는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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