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럽살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롱 Jan 24. 2022

인생 당케

당근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요?

마드리드 살이의 아쉬움 중 하나가 근사한 카페와 맛있는 디저트 찾기가 의외로 어렵다는 점. 그래서일까? 서울의 신상 카페와 새로 나온 디저트를 보면 저장해둔다. 언젠가 한국에 가면 하나씩 먹어볼 생각에 설레 하면서! 요즘은 정통 프랑스 과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파운드케이크와 머핀, 스콘류의 시대가 살짝 지나고 카페 진열대 한쪽 켠에 곱게 구운 마들렌과 피낭시에가 눈에 띈다. 북유럽의 하양 하양 깔끔한 매장 인테리어도 여전히 성행하는 것 같지만, 유럽 어디선가 찾아볼 법한 웨인스 코팅과 클래식하고 짙은색 상의 나무로 꾸며진 새 카페들도 멋스럽다. 사진을 보면 직관적으로 느낌이 온다. 아! 여기 맛있을 것 같아!


궁금한 게 많은 편이라 카페에 들르면 늘 다른 걸 시켜본다. 아 물론 장소마다 선호하는 제품이 다르긴 하다. 아티제에서는 시폰 케이크. 스타벅스에서는 에그 베이컨 베이글이나 루꼴라와 모차렐라 든 핫 샌드위치. 폴 바셋은 에그타르트. 커피빈은 머핀이나 케이크. 던킨은 아침메뉴 맛집. 지금 한국에선 어떤 카페가 유행하려나! 벌써 4년도 더 전의 서울살이 기억. 당근 케이크는 퍽퍽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고르는 일이 없는데, 우연히 들어간 세시셀라에서 먹어보고 마음에 쏙 들었다. 진한 아이스 카페라테에 묵직하면서 촉촉한 파운드케이크를 닮은 시트에 차가운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꽤나 어울려서 먹어도 먹어도 자꾸 떠오르는 맛. 시나몬 향을 즐기지 않았는데, 그 편견까지 바꿀 만큼 당근과 시나몬의 조합은 훌륭했다. 이런 게 바로 인생 당근 케이크 아닌가! 옛 기억을 더듬더듬.


그동안 학교에 다니며 프랑스 전통 레시피의 과자, 케이크를 많이 구웠더니 이제 조금 다른 걸 먹고 싶다. 카페 투어 하며 다른 메뉴를 먹어보는 버릇이 어딜 가지 않았나 보다. 오늘의 선택은 당근 케이크. 세시셀라의 감동을 추억하며 한번 구워 보기로 했다. 마드리드에서도 당근케이크를 안 사 먹어본 것은 아니다. 가까운 나라, 영국의 주요 케이크 중 하나인 만큼 시내 레스토랑이나 카페 여기저기서 판매한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당근 케이크 한 번 먹기가 어쩜 그렇게 어려운지! 당근 케이크가 너무 촉촉하고 오일리 하면 속에 부담스럽고, 크림치즈 프로스팅도 지나치게 달면 당근의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븐을 예열하고 정성스럽게 당근 두 개를 갈아낸다. 마른 재료와 젖은 재료를 섞고 당근을 섞은 후 케이크를 굽는다. 내 손 보다 나은 휘핑 실력을 지닌 핸드 믹서를 꺼내 크림치즈를 풀어주고 설탕과 생크림도 넣는다. 바닐라 엑기스도 잊지 말아야지! 오븐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미 부엌은 은은한 당근의 달달함과 시나몬 향기로 가득 찼다. 기대감이 증폭되는 순간이다. 촉촉하면서 눅눅하지 않고 포실포실한 시트가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향기의 순간에 집 구경을 시켜주면 한눈에 반해 바로 팔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이왕 동그란 케이크를 만드는 김에 귀여운 데코도 해보기로 했다. 팬트리에 들어있는 초코 곰돌이 쿠키를 올려보았다. 이름하여,


"곰돌이는 당근 케이크를 좋아해. "


눈 속에 파묻힌 당근이 연상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로즈메리도 몇 개 꽂아주고 말이다. 근사한 케이크 자태에 반해 바로 차갑게 굳히는 시간도 뒤로 한채 바로 퍼먹고 싶은 그런 날.


함정은 오늘의 케이크는 인생 케이크가 되어주지 못했다. 귀여운데 맛이 부족했다. 첫 다섯 입 정도는 훌륭하게 맛있었지만 케이크 한 조각 다 먹기에 조금 느끼하달까. 파는 수준으로 예쁘려면 더 시간 들여 정성껏 시트를 자르고 샌딩 해야겠지? 한국에서 무거운 각봉 사 오기로 결심했다. 정확하게 1센티 혹은 1.5센티 레이어를 자를 수 있어야 하니까. 게다가 가장 아래 탑을 자르지 않았더니 기름에 구운 맛이 살짝 났다. 느끼함의 주범이었던 것 같은데! 호두도 뺐는데 빼면 안 되는 재료라는 걸 깨닫기까지 딱 다섯 입이 걸렸다. 맛만큼 식감은 중요하니까. 그리고 온도. 크림을 꼼꼼히 짜주고 아주 차갑게 해야 썰어도 단면이 예쁘고 맛도 좋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레시피 덕에 마드리드에서 먹어본 어느 당케보다 맛있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한입 먹어본 남편이 오? 세시셀라와 비슷한 느낌인데라는 말에 이미 케이크 만드는 노고가 씻겨져 내렸다. 나의 인생 케이크에 가깝다니 그런 찬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본 고장 영국 혹은 디저트 왕국 한국에 더 맛있는 당근 케이크가 많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더 맛있는 당근 케이크를 만들고 싶다! 자 몇 번 더 구워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정식을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