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가다 내가 “어디”에 있는질 깨닫게 되는 때, 그때 “나”를 알게 될지도 모를 거다, 막연하게.
“길의 모양을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열네살 때, 코리아극장의 구석에서 본 구스반산트의 영화, ‘아이다호’의 대사다.
나는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 있었다.
이십여 년을 살고 있던 서울에서는 수평선을 마주하는 게 일상이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오래도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와서는 달라진 “길의 모양”에서 이방인처럼 서성거렸다.
어느날, 무작정 ‘길’을 따라 달렸다.
작은 마을, 어느 골목에 이르러 책방 문을 ‘소심하게’ 열고 들어서자 Pink Martini의 Sympathique가 들린다. 살짝 고갤 돌리니 반가운 그림책들이 전시되어 있거나 나란히 꽃혀 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바닥을 마주하고 반가운 그림책들을 한 장씩 넘기며 머문다.
수없이 관광객들이 들어섰다 나왔다를 반복해도, 그림책에 빠져 있는 내 곁을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뿐 이었다.
구좌읍 종달리의 소심한 책방 얘기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737 · 문지나 글·그림 고요한 나라를 찾아서 도서출판 북극곰
소심한 책방에는 국내 창작 작가들을 많이 발굴하는 그림책전문출판사 ‘도서출판 북극곰’의 그림책들을 만날 수 있다. 남강한 작가의 ‘우리아빠는 외계인’과 ‘나홀로버스’, 문지나 작가의 ‘고요한 나라’를 찾아서‘는 ’소심한 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문지나 작가의 ‘고요한 나라를 찾아서’는 아버지를 잃은 준이와 윤이 남매가 어느날 우연히 거실에 놓인 그림 속으로 사라진 종이비행기를 따라 아버지가 산다는 ‘고요한 나라’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우연히 들어간 그림 안의 세계는 참으로 환상적이고 따뜻하다. 아이들이 탄 낯선 버스 안엔 다행히 아이들에게 익숙한 승객이 타고 있다. 사과, 가지, 펭귄과 함께 타고 가다 아이들이 내린 곳은 부엉이 아저씨가 있는 우체국. 그곳에서 아이들은 소라껍데기가 있는 소포를 전해 받는다. 커다란 동굴이 된 소라껍데기 안을 통과해 나오자 아빠와의 추억이 있는 바닷가가 펼쳐진다. 그리고 ‘아빠 냄새’를 맡는다. 사랑한다는 아빠의 목소리도 바람결에 전해진다.
“그곳은 정말 평화롭고 고요한 나라였어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이야기가 슬픔보다 따뜻한 위로로 전해지는 그림책. 책방 안을 채우는 햇살이 그림책 위로 떨어지는 곳에서 만났다.
“길을 떠나본 자만이 되돌아 올 수 있다”
강은미 시인의 산문집 ‘정오의 거울’의 한 구절이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글에서 ‘그곳과 이곳’, ‘거기와 여기’, ‘떠남과 돌아옴’에 대해 생각했다.
열네살 때 본 영화 ‘아이다호’는 내게 끝없이 펼쳐지는 ‘길’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하였다. 길을 따라가다 내가 “어디”에 있는 질 깨닫게 되는 때, 그때 “나”를 알게 될지도 모를 거다, 막연하게.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서점’을 찾았다. 어린 시절엔 광양사거리의 ‘오늘의 책’에서 길을 따라 ‘사인자’에 머물렀다. 스무살 이후에는 두 개의 터널을 통과해 들어서던 ‘교보문고’의 시집코너 앞이였다. 서른을 넘어 중반에 이를 때는, 혜화동의 그림책 가득한 중고서점과 작은 그림책 서점, ‘프레드릭’에 머무는 나날들이 많았다.
길을 나서고 싶을 때마다 찾은 곳이 서점이였으니 돌아와 머무는 곳도 ‘책방’이구나. 책과 함께해온 방랑放浪이 즐거운 ‘유람遊覽’이 되어야지.
제주시 한경면 홍수암로 561 · 사노요코 글·그림 100만번 산 고양이 비룡소
조수리에 있는 책방 ‘유람위드북스’에는 ‘람이’라는 고양이가 산다. 제주에 한달살기로 와 있다는 아홉 살 정원이가 고양이 ‘람이’를 소개해주었다.
“람이예요. 람이는 맨날 햇빛 잘 드는 창가 쪽에 누워 있어요. 그리고 음, 저기 제 언니 앉아 있는 곳이랑 제 옆에 지나가기도 하고 제가 맨날 만질 때마다 야옹거려요. 그래서 람이를 좋아하고 그리고 귀여워요. 그리고 배랑 꼬리는 주인만 만지는 걸 허락하고 그리고 냄새를 맡을 때는 손을 부비부비해요.”
귀여운 고양이 람이가 먼저 반겨주었기 때문이였을까. 그림책이 꽂혀 있는 책장에서 '100만 번 산 고양이'를 꺼내 펼쳤다.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요코의 그림책이다.
두 작품에서 보인 ‘삶과 죽음’에 대한 경쾌하면서도 씁쓸한 시선이 이 그림책에도 머문다.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을 사랑하며 100만 번 죽고 산 고양이가 처음으로 자신이 몹시 사랑하는 고양이를 만난다. 하지만 고양이는 죽는다. 고양이의 죽음 뒤 자신도 백만 한 번째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곳에선 요시타케신스케의 ‘이유가 있어요’, ‘불만이 있어요’ 부터 토베얀손의 ‘무민’ 시리즈들까지 만날 수 있다. 고양이 람이를 소개해준 아홉 살 정원이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어요'에 등장하는 ‘신바람빔’ 때문이였다. 펼쳐보면, 왜 아이들이 코를 후비는지 유쾌하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서귀포시 중앙로 99 · 송진헌 글·그림 삐비 이야기 창비
북타임은 그림책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곳이였다. 정성훈 작가의 ‘사자가 작아졌어!’, 송진헌 작가의 ‘삐비이야기’, 김장성 작가의 ‘수박이 먹고 싶으면’까지. 그림책이 읽고 싶다면 바로 이곳으로 달려와도 좋을 만큼.
송진헌 작가의 ‘삐비이야기’는 숲 속의 아이와 숲 밖의 내가 친구가 되었지만, 결국은 맞닿을 수 없었던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고백하면 어느날의 내가 있는 그림책이다.
“내가 어렸을 때, 저 숲에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어. 겨우내 집 안에 갇혀 지내다 봄이 오면 숲에 나타나곤 했던 아이. 몸도 마음도 불편했던 삐비와는 아무도 놀아 주지 않았어. 놀려대기만 할 뿐. 하지만 나는 그애와 숲에서 노는 게 정말 좋았어. 지금 삐비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편견도 없이 함께일 수 있었던 관계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서 용기내지 못하고, 되려 외면했던 기억들이 모두에게 하나쯤 있기는 할까.
숲속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삐비를 보았지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마음에 어느날의 내가 겹쳐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어느날의 ‘삐비이야기’를 만났다.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9 · 현기영 글 정용성 그림 테우리할아버지 현북스
북갤러리 파파사이트는 저지리예술인마을, 김창렬 미술관 옆에 자리해있다. 곶자왈 지대 위에 조성되었단 예술인 마을에 이곳이 ‘곶자왈’이라는 것을 가늠케 해주는 나무들이 곳곳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들어서면, 때마다, 혹은 철마다 자리를 달리하는 전시된 책들이 보기좋게 놓여 있다. 이번엔 제주그림책 연구회의 ‘장태야, 은실아’, 현기영의 ‘테우리할아버지’, 이태준의 ‘꽃장수와 이태준 동화나라’가 나란하다.
제주도 사투리로 ‘소를 기르는 사람’을 뜻하는 ‘테우리’. 현기영 작가의 ‘테우리할아버지’는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다. 4·3에 대한 죄책감과 아픔으로 묵묵히 소를 키우며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4·3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금기였고, 입 밖으로 내어볼 수도 없을 만큼의 상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삶을 살아낸 할아버지는 병들어 떠난 친구의 암소와 송아지를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애도한다.
서귀포시 예래로 119 권윤덕 글·그림 꽃할머니 사계절
‘시인의 사랑’은 영화 ‘시인의 사랑’을 연출한 김양희 감독과 다큐 ‘이중섭의 눈’을 연출한 김희철 감독 부부가 꾸리는 헌책방을 겸한 작은 책방이다.
아무데나 툭 책들이 놓여 있는 게, 책과 책 사이를 뒤적거리고, 펼쳐보는 것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그림책은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다. 꽃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기억상실증을 앓았을 만큼 잊고 싶은 아픔이였으나 할머니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꽃같은 나이에 짓밟힌 삶이지만, ‘꽃’을 만지며 살며 할머니는 스스로와 역사를 치유해간다.
‘꽃할머니 얼굴은 두가지다. 시무룩한얼굴과 활짝 웃는 얼굴. ”웃어보려고 해도 웃을 일이 없어. 뭐 그렇게 크게 웃을 일이 있어? 좀 삐죽 웃으면 되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꽃 이야기를 할 때면 늘 활짝 웃으신다.’
눌러서 말린 꽃으로 꽃그림을 그린 할머니. ‘꽃할머니’의 꽃그림과 이야기에서 그 어떤 시절보다 오래오래 만개해 있을 아름다운 ‘꽃’과 마주한다.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백사로 29번길 6-6 정진호 글 ·그림 벽 비룡소
길을 따라가며 음악을 청하고 책방에 머물곤 하던 시간을 언젠가부터 ‘트랙과 책방의 별들’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막연하고 막막하고 아득한 길이 아닌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의 지점에 별처럼 머무는 책방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하고 화려한 빛으로 그림자를 만들기보다 어둔 길 위에 작지만 반짝거리며 머무는 책방들.
그 책방들 중 가장 앞서 만난 곳이 ‘이듬해봄’이였다. 그러고보면 ‘이듬해봄’은 캄캄한 밤하늘 위 반짝거리는 별을 세는 마음과 같은 곳, 긴 겨울 동안 다음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곳이다.
이듬해봄에서 만난 그림책 '벽'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어느 밤 길 위, 불빛이 사라진 찰나, 내 곁 충만하게 떠있는 아름다운 별을 그린 ‘별과 나’의 정진호 작가의 작품이다.
더 다가서면 더 멀어지고 안으로 들어선 줄 알았는데 밖이였으며, 볼록한 것은 오목한 것이였고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왼쪽으로 가게 되었을 때 바뀌는 건 벽이 아니라 나였단 걸 깨닫게 된다.
낮과 밤. 해와 그림자의 공존이 하루를 이루듯 안과 밖· 오른쪽과 왼쪽· 볼록과 오목이 모두 나와 당신을 이룬다. ‘벽’이라고 생각한 당신의 모퉁이를 도니 창을 만난다. 굳게 닫혀있다면 내가 열어본다. 왼쪽이라면 뒤를 돌아간다.
내 시선을 바꾼다면, 벽은 벽이 아니라 ‘길’이 되어주는 법.
서귀포시 안덕면 녹차분재로 32 안에르보 글 ·그림 바람은 보이지 않아 한울림어린이
“바람은 보이지 않아.
바람이 실어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어.
바람은 들리지 않아. 바람이 실어오는 것만 볼 수 있어."
그림책전문서점 노란우산은 오랜 세월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해온 이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는 귀한 곳이다. 언젠가부터 길을 달리며 어떤 책을 만나게 될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와 무엇과 어떻게 마주치고 마주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던 길 위의 시간이 “함께 길을 따라가는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건 길을 따라 만나게 된 책방들 덕분이였다. 그 길에서 보이지 않던 바람을 듣고, 들리지 않던 바람을 볼 수 있었다. 듣든 보든, 그 모든 바람이 내 앞에서 일렁이던 때, 사물사물거리다 둥둥 구름이 되어준 때. 보이지 않는 바람, 책장을 넘기는 순간, 책장에서 이는 '바람'이 내 곁을 따라온다.
그렇게 많은 발들 중에 걸음을 멈춘 어떤 발을 생각합니다.
신현아 작가의 그림책 ‘아홉번째 여행’에 덧붙인 작가의 말이다.
‘나는 그곳에 없어’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나는 어디에나 있어’로 끝이 난다.
걸음을 멈추기 전까지 수많은 발들과 ‘길 위’를 함께 걷는다. 빨간색 보도블럭을 또박또박 힘주어 걸었던 시간. 함께 걷는다 믿었지만 수없이 사라져간 걸음들.
길 위, 작은 책방들을 따라가는 시간 동안 ‘어디에도 없던’ 당신들이 ‘어디에도 있는’ 우연으로 다가왔다.
막연하였던 길 위에서 리듬을 타며 길을 따른다.
내일도 나는 산록도로를 지나 한라산의 어느 자락을 걸을 것이다
나의 리듬은 거기까지이다
‘라캉, 알제리, 한라산’의 마지막 구절. 현택훈 시인이 썼다.
결국 자신은 제주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시인의 말에 고향을 떠나 오래도록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이사에 이사를 거듭해가며, 머물 집 없이 늘 ‘길 위’에 있다 여긴 근원을 떠올린다. 결국 나역시 막연하게 느꼈던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고향을 떠나온 이의, 고향을 그리는 이의 보편적인 근원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길의 리듬을 따라 달린다. 그리고 지금, 길 위의 숨은방. 책약방.
*길의 모양을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분명히 와 본적이 있어.
그 언제인가 여기 머문 적이 있거든.
이런 길은 정말 이렇게 생긴 길은 아무데도 없어.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듯이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
*구스반산트, 아이다호
20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