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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asha Jan 20. 2021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수채화는 빛깔이고 유화는 색깔이다. 유화의 밝고 선명한 색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채화는 색을 머금은 빛들이 투명하게 맺혀 있는 모양이다. 맑고 경쾌하지만 가볍고 흐릿하다. 종이 위에 얇게 얹힌 색들이 잠시 눈을 씻어주고 날아간다. 시간이 지난 뒤에 그림을 떠올려 보면, 유화는 형태와 색으로 각인되고 수채화는 그림 속 공기로 떠오른다.


 기억에도 종류가 있다. 유화처럼 강렬하고 생생하게 남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번지는 기억이 있다. 유화와 같은 장면들은 대부분 선명한 사진으로 남겨져 있어서 찾아볼 때마다 기억이 덧칠된다. 그 날 입었던 옷의 색깔과 촉감, 떠들어 대던 목소리와 은은하게 퍼지던 냄새들이 층층이 쌓여 추억의 질감을 만들어 낸다.


 따뜻한 봄날엔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햇살을 받곤 한다. 저 먼 우주에서 여행 온 빛이 지구별의 푸르른 자연과 만나 팝콘처럼 튕겨오르면 눈이 부셔 잠시 넋을 놓는다. 기억의 셔터를 눌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시간이 순간을 잡아 먹은 뒤다. 뒤늦게 머리 속 드로잉북을 펼쳐서 잔상을 스케치하고 재빨리 수채 물감을 입힌다. 기억이 마른 뒤 다시 꺼내보니 물감이 번져 윤곽선은 흐릿해졌고 색은 더 투명해져서 색깔보다 빛깔에 가까워졌다. 빛깔들은 서로의 경계선을 넘나들다가 섞이고 섞여 마침내 하나의 빛으로 떠오른다. 수채화로 그려진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밝아지며 원형으로 되돌아간다.


 비 오는 날에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색들이 거리를 지나다닌다. 몇 해 전 여름, 서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줄은 먹구름을 피해서 집에 바삐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길게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마침내 세찬 소나기로 변하고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줄기를 속절없이 맞고 있는데 머리 위로 우산이 슥 올라왔다. 뒤를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남자분이 자신의 우산을 나에게 반쯤 내어주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놀라서 고개를 꾸벅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엔, 특히 이런 소나기가 내리는 날엔 버스가 거북이로 변한다. 오랜 시간동안 우산 하나를 말없이 나눠쓰다가 버스가 도착하자 가볍게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그 분의 얼굴도, 머리 위로 삐쭉 올라와 있던 우산 색깔도 흐릿해졌지만 타인에게 말없이 우산을 씌워주던 친절함은 이제 빛이 되어서 등대지기처럼 내가 향해야할 삶의 방향을 가리켜 준다.


 하늘을 바라보고 우산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랜 시간 눈앞에 놓인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에 급급해서 하늘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잠시 숨을 돌려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길목마다 우산 몇 개가 놓여져 있었다. 지금까지 비를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땅의 일들만 생각하느라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살던 나에게 누군가가 잠시 우산을 내어주고 희미한 공기만을 남긴 채 그들의 길을 걸어갔다. 마음이 아파 길거리에서 섧게 울던 나에게 따뜻한 음료수 한 캔을 쥐어주고 모든 건 다 지나가니까 힘내라고 이야기해줬던 아저씨,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날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던 내게 전철역까지 함께 가자고 선뜻 우산을 씌워주던 아주머니, 타국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숙소까지 택시를 태워 내려주곤 차머리를 돌리던 벽안의 젊은이. 나도 이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보려 한다. 형태보다는 색으로, 색보다는 빛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먹구름이 잔뜩 껴있다. 크고 튼튼한 우산을 장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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