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귀차니즘이 만들어낸 카레 열풍
‘인도에는 커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처음 들어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인도는 커리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비프 커리, 치킨 커리 등 다양한 커리요리가 있지 않은가? 첨언하자면, 위의 설명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위 문장은 ‘인도에는 커리라는 요리 분류 방식이 없다’ 내지는 ‘인도인은 자신들이 먹는 요리를 커리라고 부르지 않는다’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커리’하면 떠올리는 수많은 요리들은 ‘비프 커리’와 같은 단순화된 이름 대신 고유한 인도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인도식 요리명은 요리 재료나 조리 방식, 또는 지역명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달(렌틸 콩), 알루(감자), 고비(컬리플라워), 파니르(생치즈의 일종), 팔락(시금치), 무르기(닭), 코프타(고기 완자), 키마(다진 고기) 등은 대표적인 커리 재료이다. 마살라(크림이나 요거트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것), 코르마(마살라에 크림과 요거트를 첨가하여 부드러운 것), 사그(녹색 채소가 들어간 것), 마크니(토마토 베이스로 크림이 들어간 것)와 같은 단어는 그레이비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조금 외우기 까다롭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알아두면 인도 요리 이름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알루 고비 코르마’라는 이름을 통해 이것이 ‘감자와 컬리플라워를 주재료로 크림과 요거트가 들어가 부드러운 그레이비 요리’ 라는 점을 파악하는 식이다.
이처럼 다양한 요리에 ‘커리’라는 이름을 붙인 장본인은 바로 영국인들이었다. 당시 인도에서 생활하던 영국인들은 길이가 긴 이국적인 요리명을 기억하는 것을 귀찮게 여긴 듯하다. 인도의 요리는 영국 요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향신료 범벅의 그레이비 소스 같은 것에 빵이나 밥을 찍어 먹는 장면이 이들의 눈에 하나 같이 비슷하게 비쳤을 수도 있다.
이러한 무지와 무관심의 발로에서, 영국인들은 고기가 채소가 들어간 질척한 질감의 스파이시한 요리를 ‘커리(curry)’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이 ‘커리’의 어원으로 ‘소스’를 의미하는 타밀어 ‘카리(kari)’를 꼽는다. 하지만 ‘카리’는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인도인들 사이에서 단순히 ‘소스’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인도 현지 식당에서 ‘커리’를 달라고 요청하면 외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직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게 하기 십상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카레’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된 것 또한 어찌 보면 영국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카레는 메이지 유신 시기 영국의 ‘커리’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 요리법을 받아들이는 일에 열성적이었고, ‘커리’에도 당시 일본에서 대중화되던 서양 요리의 요소를 적용시켰다. 버터에 밀가루를 볶아 '루(roux)'를 만드는 방식을 거치는 레시피가 널리 퍼졌고, 영국식 스튜를 닮아 감자와 당근, 소고기를 넉넉히 넣는 카레가 인기를 끌었다.
일본식 카레에 쓰이는 ‘카레 가루’ 또한 영국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일본식 카레 가루의 원형이 되는 ‘커리 파우더’는 영국인들이 보다 간편하게 커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인도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향신료를 배합해,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커리’의 맛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영국식 커리파우더를 받아든 일본인들은 한술 더 떠서 ‘루’의 재료인 밀가루와 유지 성분을 더하여 일본식 카레 가루를 창조해냈다. 한국의 카레는 이러한 일본식 카레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식민지의 언어와 관습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커리’라는 신조어를 창조한 영국인들은 그 맛에 매료되어 이를 자국의 요리로 여길 정도로 깊은 애정을 과시했다. 대영제국의 영향력에 힘입어 세계 곳곳에 영국식으로 변화한 ‘커리’가 퍼졌을 때, 이를 마주한 각국의 사람들도 그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날 ‘커리’라고 불리는 인도요리 또는 그 변형은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상당수 인도인들이 이 ‘커리’라는 단어에 얽힌 세계적 수준의 오해에 불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한번 자리를 잡아버린 뿌리 깊은 언어적 오해를 바로잡기는 요원해 보인다.
『트레블 인 유어 키친』(브레인스토어, 2021)에서 위 요리의 레시피와 재료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