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리고 삶
한 달 전쯤일까요. 친한 동생 녀석이 <지옥>이라는 넷플릭스 작품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저는 계정이 없던 터라 미루고 미루다, 친 형의 아이디를 잠깐 써서 이번에 보게 됐습니다. ‘천사’라고 불리는 존재들에게 자신의 죽는 날과 시간에 대해 ‘고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가 되면 ‘사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죄인을 지옥으로 인도해간다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는 작품 속 ‘대중’이 믿는 내용이고, 해석의 여지는 아주 다양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해석이 궁금하여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언제 죽는지 아는 것은 신의 배려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각과 수면은 신의 배려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가여운 존재가 아닐까 하며 속으로 곱씹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수많은 변수들로 가득하고, 우리가 언제 죽는지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불안에 떨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긍정적으로 자기 자신은 평균 나이까지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시간만 열심히 이겨내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일부 희생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직무를 더 잘 이행하기 위해서 학습에 시간과 노력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는 날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며 남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강인한 사람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의미 있는 날들로 남은 시간을 채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남은 시간에 걸맞은 사고방식과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품 <지옥>에서는 초대 교주로 유아인 배우님이 나오는데, 수십 년 뒤에 죽는다는 고지를 받고 그 시간을 온전히 두려움과 회의감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품이겠지만, 입장을 바꿔 만약 20년 뒤에 죽는다는 고지를 받는다면, 저 역시 ‘내가 어떻게 살았길래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된 걸까? 다른 사람들은 왜 나보다 오래 살까? 내가 그 사람들보다 삶의 가치가 적나? 그럼 남은 삶은 무얼 하며 살아야 하지?’ 등과 같은 고민과 회의, 불안에 휩싸였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눈을 감은 채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를 절벽까지 걸어가는 것이잖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친구와의 다툼, 작은 연봉에 대한 불평, 오늘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에 대해 행복해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때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이죠. 정말 안대를 쓰고 절벽까지 걸어가게 한다면 우리가 주변의 공기, 냄새, 생명들의 소리, 촉감을 느끼며 걸어갈 수 있을까요? 신은 어쩌면 우리에게 ‘불완전함’을 통해 각자가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든 정해지지 않은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갈 자유는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글을 쓰며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이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제가 신의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시간을 너무 헛되게 (무한한 듯) 쓴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