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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표 seanpyo Oct 18. 2023

가을, 몽골 동쪽에서 만난 것

헨티아이막 흐흐호수



나의 첫 몽골 동쪽 여행


동쪽으로 난 국도를 따라 달렸다. 헤를렌 강을 만난 것은 오후 2시 무렵. 울란바토르를 떠나 2시간이 지나서다. 헤를렌 강은 헨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중국 네이멍구 지역을 통과하는 몽골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강을 만났다는 것은 우리가 투브 아이막(province)을 지나 헨티 아이막에 도착했다는 증거다. 몽골여행을 시작한 지 13년 만의 첫 동쪽 여행이었다. 몽골을 찾는 여행객 대부분은 몽골 중앙의 아르항가이 초원이나, 남쪽의 고비, 북쪽의 홉스골, 풍경이 남다르다는 몽골의 서쪽 여행을 한다. 테를지를 지나 동쪽 여행을 하는 여행객은 극히 드물다.


아마도 헨티 아이막에서 여행객을 만난다면 십중팔구는 칭기즈칸과 관련된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일 거라 생각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관광으로 알려진 몽골 내 대부분의 지역을 둘러보고 나서야 밀린 숙제 하듯 원고 마감에 임박해 이곳을 찾았다. 다른 여행과 달리 큰 기대는 없었다. 역사적 의미를 제외하고 보면 그저 작은 호수가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9월 초인데 초원은 벌써 가을 옷을 입었다. 두꺼운 구름이 먹과 물을 찍어 바른 듯 대지는 구름에 젖어 채도 낮은 수묵화가 되었다. 여름의 열기가 빠져나간 들녘은 어딘가 더 휑하다. 도로 위에서 스치듯 바라본 헨티의 인상은 그랬다. 신기하게도 해를렌 강을 지나 얼마 후 스마트폰 통신이 끊어졌다. 힐끔힐끔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와 메일, SNS를 확인하고 GPS로 주변 탐색을 하던 일행은 그제야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봉긋 솟은 산들이 먼 곳으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시선을 방해했다. 헨티의 풍경은 그동안 경험한 타 지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병풍처럼 이어지는 산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굽이굽이 휘는 도로는 제주 중산간이나 지방 국도변 마냥 익숙하지만 이곳 몽골에서는 오히려 낯선 풍경이다. 



끊어진 통신은 호수에 도착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자 캠프에서 물어보니 이곳 사람들은 통신이 닿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전화를 한다고 들었다. 정말인가 싶었는데 저녁 8시부터 4시간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불과 울란바토르에서 3시간 만에 깊은 오지에 도착한 것이다. 게르와 통나무집이 꽤 많은 캠프인데 손님이 없다. 주변에도 몇 개의 캠프가 보였지만 버려진 비밀의 정원처럼 사람의 흔적이 없다. 사람이 없는 것과 사람의 자취가 사라진 것은 느낌이 다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나는 전설이다'같은 영화 속 고요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의 날갯짓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침묵이 이 풍경의 일부라 여겨졌다. 해는 아직 높은 곳에 있지만 이런 곳에서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 날의 숙취와 먼 길을 달려온 노곤함까지 더해 호수까지 걷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아니니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호수를 향했다.





사과를 닮은 호수


흐흐호수(khukh Nuur)는 칭기즈칸이 왕의 칭호를 얻은 장소라 한다. 1189년 테무진(칭기즈칸)은 이곳 흐흐 호수에서 몽골 민족 전체의 칸이 되었다. 허흐(khukh)는 푸르다, 노르(Nuur)는 호수라는 뜻이다. "정식 명칭은 하르 주르흐니 허흐노르 Khar Zurrkhnii khukh Nuur로 검은 심장의 푸른 호수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는 '흐흐호수'라고 표기를 하지만 허흐호수쪽이 더 맞는 것 같다. 호수 앞에는 나무로 된 길쭉한 장승들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데 가운데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오른쪽은 아내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의자와 테이블을 들고 호수에서 가까운 목초지대로 향했다. 낮은 언덕 비스듬한 경사로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듯한 커피향과 함께 가을을 만끽했다.  나무그늘이 짙은 숲 속이라 여름에 인기가 많겠지만 가을 늦은 오후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도 아름다웠다. 




검은 심장과 푸른 호수의 사이


호수 반대편, 검은 심장이라 불리는 작은 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칭기즈칸이 올라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고 하는 나지막한 산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호수가 한눈에 보였다. 애플 로고를 닮은 지름 300미터의 아담한 물웅덩이. 호수를 감싼 초원 위에 가을이 물들고 노을빛이 내려앉아 풍요롭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단지 호수가 있는 풍경을 조망하기 위해 왔지만 마법에 홀린 것처럼 매직아워의 풍경 속으로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멀리 어워가 보이는 곳까지 검은 산과 호수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가을이라 풍경의 반은 노랗게 물들었고 모기도 날벌레도 없었다. 어워에 도착하니 근처 곳곳에 야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벼운 하이킹에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름보다 지금 계절과 오늘 같은 날씨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찾는다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 돌아오는 길, 해는 이미 능선 뒤로 넘어가 하늘 아래 모든 색이 조금 더 짙고 선명해졌다. 






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했다. 통나무집 안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커튼을 활짝 열고 식사 준비를 했다. 형태는 구분되지만 해 질 녘 푸른빛을 입은 사물이 마치 모노톤의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의 느낌을 문장으로 묘사한 후 압축하고 생략해 마침내 하나의 단어로 만든다면 아마도 ‘적막’쯤 되지 않을까 싶다. 접시와 숟가락 소리가 아니면 시간조차 멈춘 것 같은 고요함.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 식사를 시작할 즈음 갑자기 불이 켜졌다. 아직 8시가 되려면 한 시간 남았지만 해가 짧아져서 미리 불을 켜준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술을 나누며 대화를 하고 있던 중 불이 껌뻑이다 꺼졌다. 낮에 구름이 많았던 탓에 모아놓은 전기가 부족했나 보다. 잠시 후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11시가 되니 발전기도 멈추고 불도 꺼졌다. 발전기에 가려져 있던 소리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인가 생각했지만 다른 느낌이다. 별도 볼 겸 확인차 나가보니 문밖은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촉각을 깨우며 손등에 차가운 감각 하나가 생겨났다. 빗방울이다.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둠은 고요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스마트폰 빛에 의지해 더 깊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헨티에서 만난 것은 칭기즈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통신도 인터넷도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철저하게 고립된 곳에서 나는 스마트폰에 빼앗겨온 감각을 되찾았다.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걷고, 바람을 맞고, 흙냄새를 맡고, 빗방울을 느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나 '프러포즈 데이'에는 바쁜 도시인이 특별한 계기로 우연히 마주하는 자연이 등장한다. 자연은 가만히 존재할 뿐이지만 사람은 그곳에서 변화하고 전환의 계기를 경험한다. 만약 그런 낯선 공간이 당신에게 필요하다면 이곳 헨티를 추천한다.













두근두근몽골여행 2024년 책 출간 예정


유튜브 영상 칭기즈칸의 호수에서 만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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