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스카이트램 - 휘슬러스 피크 하이킹
2024년 7월, 캐나다 로키산맥의 보석 재스퍼 국립공원이 산불에 휩싸였다. 번개가 일으킨 불씨는 강화도보다 넓은 숲을 집어삼켰고, 2만 5천 명의 주민과 관광객이 대피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나는 메디신 호수에 비친 로키산맥의 장엄한 풍경과 천사의 날개를 닮은 에디스 카벨 산의 빙하를 마주했다. 전문가들은 이 자연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여행기는 자연이 보여준 마지막 순간들의 기록이 되었다. 칠리왁에서 재스퍼를 거쳐 밴프까지, 대자연의 품에 안긴 850km 여정을 통해 캐나다 로키산맥의 진정한 매력을 소개하려 한다.
캐나다 로키 여행의 시작은 캐나다 서부 BC주(British Columbia)의 작은 도시 칠리왁에서 시작했다. 이른 아침, 한국에서 함께 온 서편집장과 나는 여동생의 차에 몸을 실었다.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된 850km의 대장정이다. 프레이저 캐니언을 지나 코퀴할라 고속도로(Highway 5)로 접어들었다. 편도 2차선으로 뻗어있는 길고 고요한 도로의 오른편으로는 웅장한 캐스케이드 산맥이 함께했다.
칠리왁에서 출발하자마자, 길 한켠에서 마주친 브라이덜 베일 폭포는 60미터 높이에서 장쾌하게 쏟아져 내렸다. 폭포수가 마치 신부의 하얀 베일처럼 넓게 퍼지며 떨어지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코퀴할라 하이웨이(Coquihalla Highway 5번)로 호프를 지나 메릿으로 향했다. 이 고속도로는 BC주에서 가장 높은 고개를 넘는 루트로, 해발 1,244미터의 코퀴할라 패스를 지난다. 서둘러 출발하느라 놓친 모닝커피가 간절했다. 장거리 운전을 위해 매릿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커피를 살만한 곳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이른 아침이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A&W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때로는 계획에 없던 작은 마을에 발걸음을 멈추는 것도 여행이 주는 특별한 매력이다.
밴쿠버에서 로키로 향하는 800km 여정의 중간 지점, 캠룹스에 도착했다. 이곳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내륙의 교차점이자, 장거리 여행자들의 자연스러운 휴식처다. 1시간 남짓 달린 후 들른 캠룹스 코스트코. 이곳은 주변 소도시 주민들이 장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생활의 중심지였다. 우리도 잠시 현지인들과 쇼핑을 공유하며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리고 우리는 의외의 장소로 향했다.
북미 현지인들의 아울렛, 위너스(Winners). 이곳과의 인연은 밴쿠버 공항에 도착한 첫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랭리의 MEC에서 아웃도어 용품을 둘러본 우리는 근처 쇼핑몰에서 우연히 위너스 매장을 발견했다. 서작가는 알트라(Altra) 러닝화를 보자마자 마음이 끌렸지만, 바쁜 일정 탓에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여행자의 '다음에'는 후회로 남는다더니. 이후 들른 여러 지역의 위너스에서 그때 본 디자인의 신발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사라."
이후 재스퍼까지 400km 남짓 도로 위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숨에 달리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규정 속도를 지켜야 했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과속 딱지를 끊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 거리를 지나는 만큼 날씨 역시 변화무쌍했다. 쨍쨍하던 해가 구름에 가려지고, 비가 내리다가도 어느새 맑게 갠 하늘이 반복되었다. 캠룹스에서 재스퍼로 향하는 도로는 길고 고요했다. 캐나다의 로드트립은 미국 서부의 탁 트인 풍경과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산맥을 배경으로 도로 양옆의 침엽수들이 양손을 모아 담듯 우리를 감쌌다.
수백 킬로미터의 여정 끝에 우리는 마침내 로키에 도착했다. 마운트 롭슨 공원의 안내판이 보이기 전부터, 3,954m의 위용을 자랑하는 롭슨 산이 거대한 자태로 로키의 시작을 알렸다. 도로 앞에 우뚝 솟은 정상은 구름 속에 머리를 숨긴 채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재스퍼 국립공원 동문으로 향하는 길 왼편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장중한 산맥이, 오른편으로는 에메랄드빛 무스 호수가 우리와 함께했다. 피츠윌리엄 산을 비롯해 중간중간 모습을 드러내는 봉우리는 이제 막 시작된 로키여행에 빠져들게 했다.
재스퍼 국립공원 동문을 지나 휘슬러스 스카이트램으로 향했다. 산 중턱을 휘감아 도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트램 탑승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수기 직전, 해 질 무렵이라 탑승장은 한적했다.
다음 트램을 기다리며 주변 풍경에 빠져있을 때였다. 멀리서 안내원이 우리를 불렀다. 방금 전 차를 주차했던 그 자리에 거대한 곰이 나타난 것이다. 태그로 관리되는 곰이라고 했지만, 야생 곰과의 첫 만남이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트램을 놓친 덕분에 만난 특별한 순간.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이토록 가까이서 곰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거대한 야생의 주인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웠다.
케이블카가 탑승장 건물을 벗어나는 순간, 재스퍼의 풍경이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동안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광활한 전경이 단숨에 시야를 가득 채우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6월의 끝자락, 로키의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계절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침엽수림 사이사이로 새순의 연둣빛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더 넓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맥 사이로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가 만드는 명암이 대지의 질감을 생생하게 드러냈고, 늦봄의 햇살은 새로 돋은 초목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도를 높이다 보니 어느새 수목한계선을 넘어섰다. 울창하던 숲은 키 작은 관목으로, 바위로 바뀌어갔다. 2024년 여름의 대형 산불로 이 풍경의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그날 우리가 마주한 재스퍼의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해발 2,400미터, 여기서부터 하이킹이 시작된다. 전망대에서 휘슬러스 피크까지 이어지는 1.4km의 능선길은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를 걷는 듯했다. 한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재스퍼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거친 고원의 능선이 이어졌다.
로키로 오는 내내 구름과 비가 반복되어 정상의 풍경이 어떨지 궁금했다. 우리를 맞이한 건 맑은 하늘과 선명한 풍경이었다. 능선 너머로 우뚝 솟은 봉우리, 그 뒤로 로키의 장엄한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로키의 웅장한 산맥은, 마치 지구의 척추가 솟아오른 듯했고 눈앞에서 흐르는 구름은 놀라울 만큼 선명했다. 각자의 속도로 능선을 오르다 서작가와 동생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후는 눈길이라 운동화로는 더 이상 오르기 어려웠다. 그렇게 홀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뚝 떨어지고 바람은 더 거세졌다. 초여름인데도 발밑의 눈은 여전히 깊었다. 혼자만의 산행이었기에 천천히 걸었지만, 저 너머에서 손짓하는 듯한 로키의 봉우리들이 자꾸만 걸음을 재촉했다. 정상 근처에서 만난 평평한 바위는 완벽한 전망대였다. 이곳에서 빙하와 밴프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하얀 구름과 설산의 경계가 너무나 빛나고 선명해 오히려 가늠하기 어려웠다. 800km를 달려온 여정의 첫 순간, 로키는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봉우리들을 집어삼켰다. 산 아래 구름에서는 이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둘러 하산하려 했지만 구름이 더 빨랐다. 정상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쪽은 폭우가, 위쪽은 눈이 내리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전망대에 도착할 무렵 뒤돌아보니 산봉우리는 물론 내가 내려온 능선길마저 두꺼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비를 피해 들어선 전망대로 잠시 후 거짓말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밖으로 나가보니 자연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녘의 비스듬한 햇살이 눈보라와 만나 재스퍼의 초록 위로 무지개를 그려냈다.
그로부터 3주 뒤, 이 아름다운 풍경은 산불로 사라졌다. 하지만 산불도, 폭우, 눈보라, 무지개도 모두 자연의 일부다. 자연은 늘 변하고 순환하며, 사라짐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싹틔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순간도 마찬가지다. 영원할 것 같은 것들도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태어난다. 결국, 모든 것이 삶의 일부다. 모든 것이 삶의 일부이기에, 우리에게는 한 순간 한순간이 소중하다.
마치 이 여행처럼.
로키여행 재스퍼국립공원 휘슬러피크 하이킹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