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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Jan 02. 2024

세진아.

새벽 호출을 받고 언제나처럼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지도 앱을 켜 보니 택시로 기본요금보다 조금 더 나오는 거리였다. 계절이 바뀌려는지 밤 공기의 차가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금 열어 둔 택시 창문 너머로 찬바람이 휙 불어 퉁퉁 부은 눈을 때렸다. 잠바를 여몄지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춥다, 추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검정 목도리를 두세번 감으며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나를 그렇게 부를 사람이 없을 뿐더러… 여태까지 나를 그렇게 부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얇은 가디건을 걸친 채, 내가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수연이었다.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가 몸 바깥으로 날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누구인지 알아챌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마치 상대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나야, 수연이. 나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모를 리가 없지. 십 년 전만 해도 나는 백 미터 바깥에 있어도 수연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이라니. 십 년 만에, 수연이를 만났다는 사실과 내가 아직도 이 애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합쳐져 나는 거의 토할 것 같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와락 끌어안고 싶기도 했고, 그러기엔 너무 어색하기도 했다. 그 때였다. 악수를 해야 할까 싶어 내민 내 손을 붙든 수연이 내 품에 확 안겼다.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수연은 깔깔 웃으며 내 등을 마구 두드렸다.



                    너 표정 진짜 웃겨,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왜 그래.



열 다섯 살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애는 내 세상의 전부였고 삶의 기준이었다. 처음 그렇게 된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사실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직전이었다. 어디서부터 퍼졌는지는 몰라도, 우리 할아버지가 무당이라는 소문이 전교에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급식을 같이 먹던 애들조차 귀신 보는 애라며 나를 피했다. 내 옆에서 남자 애들이 굿 하는 시늉을 했을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던 내게 수연이 다가왔다. 그 전까지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애는 내 손에 차가운 메로나를 쥐어줬다. 한참을 먹지 못하다 눈물을 그치고 한 입을 베어물었다. 녹아내리는 메로나 향이지나치게 달콤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를 보는 수연의 눈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 애의 눈은 연한 갈색이었다. 맞다.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수연과 우산을 같이 쓰고 싶어 사물함에 우산을 숨겼다. 방학식 할 때 사물함에 쌓인 단우산만 대여섯개는 됐다. 같은 학교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 갈 땐 이과에서 문과 지망으로 진로를 틀기도 했다. 내 결정을 납득하지 못한 엄마에게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나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수연은 언제나 다정했다. 우리 사이는 언뜻 보면 가장 친한 친구 같기도 했다. 하굣길엔 늘 내 팔짱을 꼭 낀 채 비탈길을 함께 달려 내려갔고 쉬는 시간마다 만나 매점으로 향하곤 했다. 어쩌면 우리는 동성 친구였기 때문에 낯간지러운 고백을 자주 주고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장난스레 건네는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는 서로 달랐다. 내 것은 진득하고 무거웠고, 수연의 것은 좀 더 산뜻했다. 숨기기에는 조금 무거운 마음을 질질 끌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옮겨도 귀신 보는 애라는 소문은 떨어지지 않아 내겐 늘 수연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백도 없었고, 그래서 이별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모든 걸 잃어버리기를 택했다.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나는 숨어버리듯 서울로 떠났다. 연락처를 바꾸고 SNS도 모두 닫았다. 처음 몇 년은 수연을 못 봐서 죽을 것 같았지만 시간은 그런 마음도 흐려지게 만들었다. 


꼬박 3년간 내 상담을 맡았던 선생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다시 만나면 그 때 좋아했다고 꼭 말해요. 조금 생뚱맞긴 해도, 

                    그게 풀려야 세진씨 인생이 좀 편해질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맞아요….

                    대답은 참 잘한다. 세진씨.

                    진짜요. 저 이제 할 수 있어요. 그걸 못하면, 죽기 전에 유언으로라도 남길게요.

                    진짜?

                    저는 걔한테 상속도 꼭 해 줄 거예요.



농담처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생 못 만날 테니 죽기 전 유언으로 남기고 말 거라 생각했는데…. 선물인지 벌인지 모르게 들이닥친 이 순간에 나는 얼레벌레거리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그 애를 끌어안고 있는데, 문득 너무 얇은 수연의 가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팔을 풀고는 목도리를 풀어 수연의 목에 돌돌 감았다.



                    추운데 이게 뭐야.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너 보러 왔지.

                    뭐?

                    농담이야, 바보야. 볼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 마침 네가 보여서. 너는 여기서 뭐해. 잘 지냈어?

                    나…. 나는 잘 지내지…. 먹고 살 만은 해.

                    좋네.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 야…. 사는 게 바쁘다 보니깐….



수연이 말 없이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우리는 조금 긴 침묵을 견디며 서로를 바라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상담 선생님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좋아한다고, 아니, 좋아했다고 할까. 아니다. 너무 어이없을 거 같은데. 갑자기 십 년 만에 나타나 뭐 하는 짓이야.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보면 꼭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 무슨 얘기?

                    이런 말 너무 생뚱맞나.

                    어…?

                    네 생각 되게 오래 했어. 보고 싶었는데…. 못 봐서 아쉽더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그냥…. 그랬다구. 그래도 잘 산다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그 때 휴대폰 벨소리가 수연의 말을 끊었다. 호출한지가 언젠데 왜 안 들어오냐는 실장님의 전화였다. 예, 죄송합니다. 바로 앞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수연의 손을 꼭 잡았다. 밖에 오래 서 있어서인지 손이 차가웠다.



                    너도 여기 볼일 있어서 왔댔지? 잠깐만 기다려.

                    그럴까.

                    나 일하러 온 거라서, 잠깐 사무실만 들렀다가 나올게. 차 한 잔 하자. 목도리 꼭 하고 있어. 추워.

                    그래. 이따 봐.


긴 복도를 따라 뛰어들어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잠바를 벗고 옷을 제대로 갖춰입는 내게, 곤색 잠바를 입은 실장님이 서류철을 내밀며 핀잔을 던졌다.



                    부른지가 언젠데 이제 오냐. 정신 머리는 어디 두고. 입관 몇 시간 안 남았어.

                    아, 예예. 금방 다녀올게요. 식장 계약이랑 상복은 다 한 거죠?

                    너 늦게 오는 바람에 내가 다 했지. 도우미 아주머니들 왔는지 체크부터 하고 와. 105호야.



수연이 건넨 말이 자꾸 떠올랐다. 보고싶었다는 한마디와 십 년만에 수연을 만났다는 사실이 뒤섞여 가슴은 다시 두근거렸다. 목덜미 쪽 핏줄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쿵쾅거렸다. 발걸음은 가볍고 손발이 뜨거웠다. 잠바도 주고 올 걸. 아, 그냥 같이 오자고 할 걸. 진짜 바보네. 그 추운 데다가 걔를 왜 세워놓냐, 이새끼야. 기쁨과 설렘, 어색함과 반가움이 때문에 나는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105호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에는 수연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상주 쪽으로 꾸벅 인사하고 나는 바로 주방 쪽으로 향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아주머니 두 분 오셨지요? 피곤하시겠지만 수고해 주세요.

                    예, 예. 식사는 했어요? 안 했으면 여기서 먹지.

                    아닙니다, 저 볼 일이 있어가지고요. 감사합니다, 이모님.

                    여기도 젊은 사람이라 문상객이 별로 없겠더라…. 사람 없으면 우리 조금 일찍 들어갈게.

                    아이, 그래도 좀 봐주세요. 클레임 들어오면 저희가 되게 곤란해져요.

                    으이구, 알았어.

                    저 그럼 이모님만 믿고 일 보러 들어갑니다.

                    응, 사인만 해 주고 가.



서류철 가장 맨 위에 있는 서류를 꺼내 슥 훑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꿈꾸는 건가. 눈을 씻듯이 비비고 다시 서류를 똑바로 봤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름이 서류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과 아무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챙챙 부딪쳤다.


아니야.

아닐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렸다.


아직 다 꾸며지지 않은 제단 위에 수연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얇은 가디건에 검정 목도리를 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서류를 한 번, 사진을 한 번 다시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잡은 수연의 손이 너무 차가웠던 걸 생각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광대뼈가 우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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