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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Jan 02. 2024

8월, 데이트

그 날은

매미 소리도 없는 8월이었다.


나와 부영은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만났다. 횡단보도 너머로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에서 고스란히 햇볕을 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그 애가 보였다. 짙은 색 장미 넝쿨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의 원피스가 바람에 날리는 걸 가만히 보는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왔다. 오피스텔 홍보지인지 헬스장 전단인지 모를 구겨진 종이를 여러 장 쥔 채로 부영은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2년 전에 한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팀플 끝나고 술을 먹다 내가 부영에게 먼저 키스했다. 얼마나 오래 사귀었어요? 누군가가 물으면 부영은 아직 얼마 안 됐어요. 라고 말했고 나는 네 오래 사귀었죠. 라고 대답했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얼마 못 가 시들해지곤 했다. 3개월이면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익숙함에 사랑을 매치시키기에 나는 너무 어리고 산만했다. 그런 것 치고 부영과는 아주 오래 만난 편이었다. 편해서 좋았고 헤어질 이유도 없었다. 그렇지만 재미있지도 않았다. 만나서도 각자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 데이트 하자.


약속을 잡은 건 부영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너 알바 안 가지, 그 날 맥긴리 전 보러 가자. 내가 예매할게. 밥도 먹고 바람도 좀 쐬자. 우리 나간 지 오래 됐잖아.

식당 예약은 내가 할게 그럼.



*

식당 앞에 가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예약 날짜를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말씀 주신 존함으로는 다음 주 토요일 점심으로 예약이 되어 있네요. 원래는 저희 쪽에서 바꿔드릴 수 있긴 한데 오늘은 잔여석이 없어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냥 전시 보고 나서 밥 간단하게 먹자.

미안해….

괜찮다니깐….


네이버 평점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찾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예약까지 했으니 대안 따위는 생각해두지도 않았다. 앱을 켜서 즐겨찾기로 찍어 놓은 곳들을 훑어봤다. 죄다 일 킬로미터 정도는 걸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982m 거리였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내게 부영이 팔짱을 꼈다.

그 애의 팔은 너무 축축하고 뜨거웠다.



*

끝이 어디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사람을 구경하러 온 건지, 사진을 보러 온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줄지어 선 사람들의 목에서 선풍기가 붕붕거렸다. 선풍기를 가져오지 않은 건 나와 부영밖에 없는 것 같았다. 셔츠는 물론이고 바지까지 축축하게 젖었지만 어디에도 그늘은 없었다. 두피에 송송 난 땀들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오랜만에 바르고 나온 파운데이션이 물기와 섞여 들뜨기 시작했다. 부영은 덥지도 않은지 팔짱을 풀지 않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 전시 미리 보고 있자.

어떻게?

이걸로.


부영은 구글에 ‘라이언 맥긴리’라고 검색해 나온 결과를 내게 내밀었다. 사진 여러 점이 떴다. 나름 화질 괜찮지 않아? 나는 이 사진이 마음에 들더라. 부영이 가리킨 사진은 나체의 사람들이 어두운 숲 속에 뒤엉켜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친밀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휴대폰을 받아드는데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남자가 무엇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내 팔을 세게 쳤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땅에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휴대폰을 집어드는데 부서진 액정 조각이 검지손가락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살짝 배어나왔다. 이거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부영의 목소리가 떨렸고 그와 동시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 팔을 친 남자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


저기요. 그쪽이 쳐서 이거 떨어졌잖아요.

네? 제가요?

네. 그쪽이 제 팔 치셨잖아요.

아니, 줄 서느라 붙어 있으면 밀릴 수도 있는거죠. 그러게 꽉 잡고 있어야죠, 폰을.

아니…. 저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책임 돌리지 마세요.

아니…. 저기요.


다음 순서 입장하실게요.


직원이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던 펜스를 치웠다. 우리가 입장할 차례였다. 내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나를 슥 밀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손을 잡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아 나는 말도 움직임도 잃었다. 잠시간의 정적 이후 정신을 차린 나는 부영의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 황급히 전시장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남자도,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전시장 안쪽으로 파고드는 동안에도 부영은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사진을 보는 둥 마는 둥 일 층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서야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하늘색 셔츠는 땀에 젖어 짙은 파란색이 되어 있었다. 에코백을 고쳐 들고 아까 부영과 서 있었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부영은 그곳에 없었다. 손을 꼭 붙잡고 선 사람들만 우글거렸다. 불안과 짜증이 뒤섞여 심장이 두근거렸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땡볕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지도 않았다. 애꿎은 에코백 손잡이만 만지작 거리며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손이었다.


왜 먼저 갔어. 기다렸는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부영은 입을 닫았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 아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미안하다는 말이 토기처럼 울렁이다 속으로 쑥 들어갔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가득했고, 오후 두 시의 햇볕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굳은 돌처럼 꿈쩍도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 둘 싸우는 거 처음 보냐? 고래고래 고함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부영의 팔을 붙들고 사람 없는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팔을 놓아주고 우리는 다시 마주 섰다. 나도 걔도 말이 없었다. 내가 부영의 여러가지 면 중 가장 참기 어려운 면이 바로 이거였다. 수틀렸을 때 내가 말 안 하면 자기도 말 안 하는 거. 내가 할 때까지 입 꾹 닫고 있는 거. 절대 한 마디도 안 하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 얼마 전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다투던 날에도 그랬다. 말 좀 해봐. 뭐라도 말해 봐.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는 내 앞에서 그 애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야, 너 우는 거 배우는 학원이라도 다녔냐? 얘기 좀 해 보라고. 책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기도 한 그 애의 눈 앞에 서면, 나는 말할 기운조차 잃어버리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애의 턱을 억지로 잡고서라도 입을 열게 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랬다.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건 부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 다, 침묵을 끝내는 법을 몰랐다.


갑자기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와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축축한 손이 젖은 내 얼굴에 와 닿았다.


쨍- 하는 매미 소리가 담벼락에 드리운 나무 그늘에서부터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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