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5: [더 현대]적인 폰트 해피니스 산스
이것은 글이 아니다. 본고딕이다.
흰 바탕에 검은 선이 그어지면 글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모양을 의식하지도 못한채 전달된 내용을 읽죠. 뇌리에 남는 것은 모양보다는 느낌입니다. 분위기나 인상, 그런 것들로 몰래 사람의 머릿속에 스며들게 되죠. 그래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폰트에 주목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할 때 약 91% 확률로 문자를 사용할 테니까요. 뇌피셜이지만.
지금 이 글 역시 브런치에서 제공하는 본고딕 라이트로 작성되었습니다. 브런치의 서식값이 분명 영향을 주었겠지만 깔끔하고 편안한 인상을 가진 서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각은 브런치를 이용하는 작가, 그리고 독자들에게 '브런치의 질감'으로 다가갑니다. 연한 상아빛이 도는 면 셔츠를 입고 얇은 테의 검은 안경을 쓴 공간의 주인, 브런치씨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읽든 다 들어주고 찾아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글이 많은 이 공간에서도 우린 편안하게 당신을 맞이할 공간이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듯 합니다.
폰트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는 에디터이자 창작자의 시선에서 폰트가 어떤 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지 늘 주의깊게 보는 편이고요. 특히 폰트를 통해 기업이 브랜딩을 하는 방법 중엔 무료폰트 배포가 있습니다. 상업용 무료서체 시장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도 있지만, 성공적인 효과를 거둔 곳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배민 폰트나 네이버 마루부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인정하겠죠. 상업적으로 사용할 순 없지만, 폰트로 충분히 기업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현대카드의 유앤아이 서체도 빼놓을 수 없겠고요.
최근 또 꽤 매력적으로 기업의 정체성을 보여주려는 폰트가 눈에 띄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현대백화점이 지난 3월 상표권을 출원한 해피니스 산스입니다.
또 현대네요. '현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그런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말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브랜딩을 하는 입장에서는 현대라는 이름을 달고선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긴 조금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이름값을 해야만 하는... 이름이랄까.
저는 해피니스산스를 꽤 잘만든 무료폰트라고 생각합니다. 프로포션 페이지를 읽어내리면서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하네. 이미 잘 만든줄 알고 있네.' 라고 속으로 중얼 거렸는데.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이 폰트가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현대백화점의 가치를 보여주면서 예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죠. 그들이 내건 슬로건 처럼 풍요롭게, 행복하게. 그리고 프로모션 페이지에 써있진 않지만 영하게, 밝게, 맑게. '더 현대'의 이미지에 걸맞게 우리를 표현하겠다.
폰트 소개 영상을 보면 이 폰트로 어필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군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ASMR 뺨치는 감각적인 소리의 사용, 빠른 화면전환, 비비드한 도형들이 들어간 이 영상을, 설마 기존의 현대백화점 고객들이 볼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진 않았을 테니까요. 실제 더현대의 경우 다양한 시도로 MZ세대를 끌어 모으고 있죠. 그들을 공략해 매출 신기록을 달성했다느니, 더현대 서울을 제외한 다른 현대백화점 점포와 비교했을 때 20~30대 매출 비중이 두배 이상 높다느니 하는 최근 기사도 있습니다. 현대백화점이 더 현대스러운 폰트를 만든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자를 좀 더 살펴볼까요? 이름답게 글자체에서 '신남'이 느껴집니다. 볼드서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의도적인 표현 때문입니다. ㅎ의 머리꼭지인 상투부분과 자음의 마지막 획 맺음 부분이나 이음줄기(가령 위의 사진에서는 ㅅ에서 쉽게 찾을 수 있죠)에 상승하는 곡선을 그려낸 것이죠. 대체로 고딕을 맨 눈으로 봤을 때는 직선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이 서체는 현대적인 고딕의 뼈대에 발랄한 감성이 느껴지는 곡선을 더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표현은 한글에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0, 1, 2, 7의 경우 대체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데요. 백화점의 경우엔 숫자를 쓸 일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통일된 양식에서 다른 표현을 가지고 있는 대체폰트들은 그래픽에 활용하기도 좋아보여서 사용자 입장에서도 기대가 됩니다.
무료폰트는 대체로 적은 비용으로 적은 인원이 만들게 되므로, 잘 골라 쓸 필요가 있는데요. 그럴 때 잘 만든 폰트인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제작사 이름이 있느냐, 검수과정이나 글꼴 제작과정에 누가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느냐, 제작사에서 그 내용을 드러내고 있느냐 등등을 파악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AG타이포그라피 연구소에는... 그것이 있군요. 충분한 지원을 받아 질적으로도 우수한 폰트를 만들었을 거라 짐작 되는 부분입니다.
이 폰트는 배리어블 폰트도 지원합니다. 디지털상에서 사용하기 좋겠죠. 앞으로 더현대가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뭔가를 벌이거나, 아니면 상당히 메타적인 상호 교류를 할 때 사용 될 수도? 이건 너무 나갔나. 그래도 앞으로 더 현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폰트의 인상에서 느껴지는 바, 더현대 근처에 사는 분들이 점점 더 부러워 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쁜 전시를 많이 하더라고요. (흑흑)
평소처럼 방구석 음악가라고 하려다가... 오늘 내용은 좀 더 포장, 외양이 주는 감각을 다루는 폰트 이야기라서 창작자로 급하게 선회합니다. 평소 제가 자주하던 음악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실 오늘도 앨범아트를 만드느라 폰트를 뒤적거리긴 했습니다. 책에 올릴 두 번째 곡 작업이 얼추 끝나가고 있거든요. 그건 10월에 책과 텀블벅에서 공개하도록 하겠고...
책을 만들다 어느순간 '글자만큼 아름다운 디자인은 없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활자디자이너 이용제 교수님은 '글자의 역사가 유구한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죠.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양을 좀 처럼 눈으로 담고, 왜 이 글자가 좋아보이는지를 잘 생각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무언가를 만들고, 만들다가 더 잘 만들고 싶어서 '왜 난 좋아보이는 걸 못만들지? 분하다!'라는 생각을 하기 전까진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나 노력하고 찾아보면, 그것이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더라도 무언가 근거가 하나씩 생기고 나만의 감각이 되어 체화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순간에는 자기 스타일이 되는 것 같고요.
저도 그렇지만 꼭 모두가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우리는 누구나 창작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만든다면, 브랜딩까지 할 줄 알아야(하는 방법이라도 알아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현대백화점의 해피니스 산스는 개인과 기업이 브랜딩을 할 때 참고해 봐야할 매력적인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어떻게 매력적인 표현을 가진 폰트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어떻게 어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만 하죠. 그러니 그저 지나가는 폰트, 디자인, 어떤 브랜드적 표현 방식을 창작자라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창작의 순간 기쁨 속에 타오르던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결론입니다. 더현대는 해피니스 산스로 해피를 전합니다. 저는 책속에서 Bizarrrrrrrre한 공간을 만들고 있고요. 여러분은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어떻게 그 의도를 매력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를 심어두고 있나요. 오늘은 해피니스 산스의 웃는 '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료 출처:
서체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GdVkLGayPo&t=2s
서체 출원
https://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494
AG폰트 해피니스 산스 프로젝트 페이지
https://agfont.com/project-fonts/Happiness-Sans
'MZ 세대 끌어 모은 더현대' 기사
https://biz.chosun.com/distribution/channel/2022/02/27/AUQQ7B7GAJFNZBB3Y5WYICCGI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