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배우다(2)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뉴욕 카네기홀을 가득 채운다. 피아노 건반 위를 섬세하고도 격렬하게 춤추는 손가락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청년 조성진.
공연 24시간 전, 조성진은 독일 베를린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애초 공연에 예정되었던 러시아인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전쟁 발발로 연주를 못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휘자는 급히 조성진을 찾았다. 조성진이 그 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한 건 2년 전. 숙소에서 잠시 연주해 보니 엉망이다. 그럼에도 조성진은 공연을 약속한다. 매니저에게 밤새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한 호텔 로비를 빌려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연습한다. 짐을 싸서 뉴욕으로 날아간다. 조성진은 피아노 건반을 귀엽게 누르던 꼬마시절부터 꿈꾸고 또 꿈꾸었을 카네기홀에서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조성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나는 주식 등 무모한 투자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빚을 졌다. 직장생활을 접고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큰 포부를 지니고 세상에 나간 게 아니었다. 그저 빚을 갚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러 사업에 계속 실패하다 온라인 마케팅이라는 영역을 만나고부터 조금씩 희망이 생겼다.
고객 한 명, 한 명을 만날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절박하고 간절했다. 고객이 50을 원하면 100을 줘서라도 그들을 꽉 붙잡아야 했다. 나의 간절함은 몇몇 고객들에게 압도적인 만족감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의 지인들을 소개해주며 사업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던 중 비약적으로 사업의 규모가 커지게 된 시기가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큰 손’을 만난 것.
당시 내 사업의 규모는 그 ‘큰 손’의 파트너가 되기에 많이 미약했다. 그분과 같이 일하던 업체에 사정이 생기면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는 중이었다. 한 지인의 소개로 나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나는 ‘큰 손’의 플랜 B였지만 그저 해오던 대로 기대 이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후 그 ‘큰 손’은 나와 특별한 파트너 사이가 되었고, 주위의 또 다른 ‘큰 손’들을 소개해주었다.‘큰 손’들과 일하면서 나의 시야는 넓어졌다. 사업가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티핑 포인트가 된 것이다.
홍콩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주성치를 아는가? 영화 <소림축구>, <쿵푸허슬>로 유명한 그 주성치 말이다. 주성치는 어린 시절부터 배우를 꿈꿨다. 중학교 졸업 후 연예인 기획사에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다. 혼자 가기 쑥스러웠던 주성치는 친구를 데려갔다. 주성치를 심사했던 심사관은 “슬퍼야 하는데 왜 웃음이 터지냐”며 주성치를 오디션에서 탈락시킨다. 도리어 주성치가 데려간 친구가 오디션에 합격해 버린다. 그 친구는 <무간도>, <화양연화> 등으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는 양조위다.
오디션에 떨어진 주성치는 포기하지 않고 연기에 도전했다. 1981년부터 홍콩 드라마 엑스트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친구 양조위는 데뷔 1년 만에 ‘왕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주성치는 무려 7년 동안 엑스트라로 연기한다. 친구 양조위가 주연한 영화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자주 맡았다. 친구를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배우의 길을 떠날 법도 한데 주성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성치는 유명 어린이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88년. 감독 겸 배우인 이수현(리슈센)의 눈에 띄어 영화 <벽력선봉>의 조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 영화로 금마장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그 뒤 주성치는 코미디 영화의 주연을 맡으면서 대스타가 된다.
주성치는 시상식에 올라설 때마다 이수현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했다. 주성치에게는 감독 이수현이 ‘큰 손’이었다.
카네기홀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거라고 약속받고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은 없다. 영화 주연 자리를 약속받고 배우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도 없다.
거장도 엑스트라일 때가 있었다.
거장도 누군가의 대타인 시절이 있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기만 한다면, 분명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확 끌어올려줄 ‘큰 손’을 만날 것이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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