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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러가는하루 Dec 22. 2023

퇴사자, 직장 선배가 준 기프티콘을 쓰지 않는 이유는

지긋지긋하지만 계속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올해 가을, 3년 반 다닌 회사에서 퇴사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힘들고 지긋지긋한 일이 참 많았던 곳인데, 막상 떠나려고 마음을 정리하다 보니 나에게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감정은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마지막 날 동료 한 명 한 명에게 선물과 손 편지를 전달했다. 휴직 중이던 S만 빼고.


S는 신입사원 시절 나의 팀장이었다. 우리는 신사업 팀에서 2년간 함께했다. 그때 회사 생활은 매일이 강행군이었다. 5일 중 3일 야근은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았고, 비즈니스 변동성과 불확실성도 만만치 않아서 팀 분위기는 항상 예민했다. 게다가 슬프게도 나는 잔실수 많고 말귀를 쏙쏙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한 신입사원이었기에 S에게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S의 말들에 눈물을 뺀 날도 많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매일 혼나고 스스로를 책망하느라 하루하루 자존감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난 S를 좋은 감정으로 기억한다. 


S는 팀원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진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니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지만, 정말 그랬다. 퇴근 후 탈진해 돌아가는 나에게 S는 '고생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열심히 해주어 고맙다'라는 카톡과 함께 음료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내가 혼자 야근을 하고 있으면 퇴근하다 돌아와서 샌드위치를 챙겨주기도 했다. 이전에 인턴 생활을 했던 다른 회사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섬세함이었다. 그런 S를 통해 나는 내가 그저 회사를 굴리는 부품 중 하나가 아니라, 진정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느꼈다. S는 소소한 스몰토크도 잘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여행 가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어떤 카페를 자주 가요? 그 카페에서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업무뿐 아니라 서로의 개인적인 취향 이야기도 술술 나누며 나는 S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시간에 맞춰 클라이언트에게 공지사항을 안내해야 했는데 소통이 꼬여 놓친 것이다. 이 일로 S는 클라이언트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다행히 클라이언트는 쿨하게 넘겼으나 난 내가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구나 싶어 울적하고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S에게 카톡이 왔다. 카페베네의 조각 케이크와 커피로 구성된 '힘내 잘될 거야 set' 기프티콘을 보내준 것이었다. 내 실수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이 그저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짧은 메시지카드와 함께. 언젠가 우리 집 앞에 카페베네가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챙겨준 것이었다. 순간 울컥했다. 팀원의 초보적인 실수를 커버해야 하는 S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먼저 나의 마음을 헤아려준 것이 고마웠다. 그 순간 정말 잘해야겠다고, 이 팀에서 어떻게든 제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로도 회사는 늘 바빴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이 쉼 없이 이어졌고 업무량은 계속 많았다. 모든 직장생활이 다 그렇듯, 못 하겠다 싶어 그만두고 싶은 날들도 많았지만 뿌듯함을 느끼는 날들도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집 앞에 있었던 카페베네는 문을 닫았다. 당시 카페베네 매장은 하나둘 거리에서 사라지던 시기였기에 S가 준 기프티콘은 사용하지 못하고 계속 기한만 늘리게 되었다. 


하지만 2년 뒤, 신사업 팀은 해체되었다. 추진하던 비즈니스는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고 팀원들은 탈진했다. 결국 회사는 이 비즈니스를 더 끌고 갈 힘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 후 나와 S는 서로 다른 팀에 소속되어 서로 다른 업무를 했다. 여전히 한 회사에 다니지만 자주 마주치지는 못하면서 각자의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불행히도 새로 옮긴 팀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을 하는 동안 계속 '여기는 나와 안 맞는다'라는 생각을 했고, 성과도 시원찮았다. 매일이 전전긍긍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변화된 환경에 잘 뿌리내리고 정착하려 애를 썼다. 이직을 하기에는 아직 무서웠다. 그래서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애를 쓰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난 신입사원 시절 S가 준 기프티콘을 사용하지 못했다. 근처에 카페베네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꼭 부적처럼 생각했었다. 기프티콘 사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카톡이 올 때마다 과거를 떠올렸다. 초보적이었던 나의 실수와 그런 나를 포용해주던 S, 그리고 그 순간 '정말 잘해야겠다'라고 다짐하던 나를 회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새로운 팀에 잘 녹아들지 못하고 불안과 자기 의심에 휩싸일 때마다 '괜찮을 거야, 이 고비도 잘 넘을 수 있을 거야' 하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애는 쓰나 성취감은 바닥인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S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에 들어갔고, 나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S와는 백수가 된 후 따로 만나 그간 밀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신사업팀 해체 후 새로운 팀에서 성장 없이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발전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가 잔뜩 쌓였기 때문이었다. 또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 같다고, 삶의 방향성 없이 그냥 되는 대로 막 살아온 게 후회된다고도 말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그제야 내 삶의 북극성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는데 '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이지?', '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내가 삶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같은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해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글쎄, 삶의 목표나 가치 같은 건 나도 잘 모르겠네." S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하루는 모르겠지만 저는 알아요. 그때 그 신입사원 시절에 비해 하루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를요. 함께 하는 동안 저는 하루가 계속 꾸준히 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아는 하루는 오늘 얘기한 이런 고민들도 잘 헤쳐나갈 거예요. 그리고 분명 내년에는 본인에게 더 좋은 자리에 가 있을 거예요."


S와 헤어지고 돌아오며 함께 나눈 대화를 돌아보았다. 나보다 더 나를 믿는다는 듯 확신 있는 어조로 '더 좋은 자리에 가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던 S의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다. 그 분명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고마웠다. 나조차도 응원하지 못하는 나의 미래를 긍정해준 것이 고마웠고, S의 진심이 있었기에 그 지난한 회사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고마웠다. 역시, 이 회사는 마음고생은 했지만 결국은 고마운 마음을 제일 많이 남기고 떠나게 되는 곳이었다. 


퇴사를 한 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S가 준 '힘내 잘될 거야 set' 기프티콘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전히 매번 사용 기한을 연장해가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 막막하고 치열하고 가끔은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게 곁에서 힘을 주는 좋은 선배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그 시절 내가 얼마나 행운이 가득한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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