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백수, 올해부터주 3회 달리기를 습관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삶에서 출근이 사라진 이후 하는 일 없이 매일 놀고먹다 보니 몸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며 내 하루에는 소박하지만 분명한 성취와 쾌감이 생겼다. 이제 달리기는 백수 생활의 행복을 담당하는 하나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달리기가 완전한 습관으로뿌리내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처음에는 '주 3회'라는 규칙을성실히 지켰다. 백수가 되고부터는 종일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버리기만 했는데, 달리기를 하니 실로 오랜만에 '오늘의 투두 리스트'를 갖게 된 것이다. 비록 그 투두 리스트에 올라 있는 건 달리기 하나뿐이지만 그거라도 해내는 내가 기특해서 더 욕심을 내 꼬박꼬박 달렸다.하지만 한 달이 지날 무렵 루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또 다른 날은 급한 약속이 생겨서 달릴 기회를 날렸다. 이 작은 금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탓이었을까. 한두 번의 결석은 금세 서너 번으로 늘어났다. 어떤 날은 비가 올 것 같고, 어떤 날은 너무 춥고, 어떤 날은 그냥... 너무 귀찮았다. 조그맣던 금은 어느새 눈에 띄게 커졌고, 착실하던 루틴에도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따박따박 완료 표시가 찍히던 초반과 달리 점점 휑해지는 투두 리스트를 볼 때마다 열의가 푹 꺾였다. '한 달간 잘 지켜왔는데 이렇게 망해버리다니.'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까워 한숨이 나왔다. 우리 몸은 항상성이란 게 있어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싶어 한다는 정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 내가 또 이러는구나. 왜 나는 늘 뭔가를 꾸준히 못 하지?' 일기 쓰기, 간식 끊기, 제시간에 자고 일어나기 등등 그동안 작심며칠로 끝나버린 수많은 시도들이 떠올라스스로를 질책했다. 달리기도 이렇게 결국 멀어지는 걸까? 그저 '또 망했다', 망했다는 말만 입속으로반복했다.
MBC <무한도전> 화면 캡쳐
그렇지만 다음 날에도나의 뜀박질은 이어졌다. 지금까지는 작심며칠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나 또 이러네' 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나의 패턴이었다. 좋은 습관을 만들겠다 다짐한 적 없었던 사람처럼 대충 흐지부지 끝내버렸다. 하지만 이번엔 무엇이 달랐던 걸까. MBC <무한도전>의 정준하 짤처럼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여태껏나와의 싸움에서는지는 것에만 익숙했지만 앞으로는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지 약함'이라는 딱지도 그만 붙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달리기라는루틴 역시 이미 한 번 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망한 대로 더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망함 이후의 달리기'가 새로이 시작되었다.오랜만에 다시 뛰는 터라 전보다 확실히 움직임이 둔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왜인진 몰라도 한 번의 망함을 받아들이고 또다시 달리는 내모습이좋았다. 나를 더 응원해주고 싶었다. '습관을 만드는 게 나만 어려워? '망했음'이라고 인증마크가 붙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 더 이상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루틴을 말아먹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번 삐끗했어도 다시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습관이든시도하다 안 되면 적당히 물러나 원래 살던 대로 돌아가는 게 제일 쉬울 것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 심지어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근육통에 고통받을 필요도 없고, 나가 뛸 시간에 꿀 같은 낮잠을 잘 수도 있고, 러닝화를 살 돈을 아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달리기가 내 삶의 일부가 되면 좋겠다.왜 지금까지도전했던 수많은 습관들 중 유독달리기에이렇게까지 진심인 걸까?단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라는 마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언제부턴가 달리기는 나에게 단순히 백수 생활의 활력과 성취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을 더 주고 있기때문이다. 예를 들면, 망했다는 자책에만 빠져 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내 모습을발견하는 일 같은 것. 그런 점들이 나를 꾸준히 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