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반 다닌 회사에서 퇴사한 후 이직 대신 달리기를 시작했다. 남들은 일과 삶에서 자리 잡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을 30대 초반, 이직을 미루고 커리어 공백을 갖는 게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장 새 조직에서 일을 하기에 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나다움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에 커리어를 일시 정지시켰다.
그러던 중 달리기를 만났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백수 생활에 달리기는 상상 이상의 활력을 주었다. 목표한 대로 끝까지 달렸다는 성취감, 스스로 건강을 챙긴다는 뿌듯함, 비루하긴 해도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자랑스러움은 물론, 달리기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꾸준히 쓰게 된 것 역시 뜻밖의 이득이었다. 그렇지만 달리기가 늘 좋은 것만 주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주로 달리기의 장점을 언급했지만, 사실 아주 깊고 진한 절망이 몰려오는 순간도 있다. 바로 성장이 없다고 느껴질 때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게 된 계기는 '어제보다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3km를 뛰는 데도 죽을 듯 헉헉거렸는데 어느 순간 3.5km를 돌파하고, 이제 4km 정도는 가뿐하게 달리는 내가 기특했다. 체력도 확실히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달리기는 노력하는 만큼 느는 운동이구나!' 그렇지만 이런 명쾌하고 즉각적인 성장의 맛이 쭉 이어지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기가 왔다. 아무리 힘을 내 달려도 몇 주째 5km의 벽이 깨지질 않았다. 4km대 후반까지는 어찌어찌 달리겠는데그 이상은 체력이 부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모래주머니라도 단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더는 못 뛰겠다'라는 마음의 소리는 신경질이 되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런 나를 누군가 지켜봤다면 얼마나 웃겼을까. 힘들어서 시뻘게진 얼굴에 죽을 것 같은 표정, 입에는 알 수 없는 분노의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여자. 보기엔 우스꽝스럽겠지만 난 속상했다. 마음은 5km고 10km고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은데 현실은 정반대였으니까. 사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보다 몇 주째 발전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어제보다 성장한 나는 무슨. 달리기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전히 아쉬운 기록으로 달리기를 마쳤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나름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데 왜 나아지지 않지? 밥을 덜 먹어서 힘이 없었나?' '정체기가 있을 수 있지. 근데 그게 몇 주씩이나 갈 일인가?' '이리저리 검색해보면 한 달 만에 벌써 5km를 돌파했다는 러너들도 수두룩한데... 나는 왜?' 머리가 아팠다. 성장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 달리기도 투자한 대로 성과가 바로바로 나오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해봐도 괜찮지 않았다. 대체 왜 성장하지 않는 거냐고!
사실 성장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난 모든 면에서 느렸다. 공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심지어 게임 규칙을 숙지할 때도 남들보다 오래 걸렸다. 그런 내가 답답하고 싫었다. 이런 기분은 직장을 다닐 때 제일 많이 느꼈다. 직장에서는 거의 모든 일에 데드라인이 있다. 오롯하게 나의 속도로만 살 수는 없다. 원래 낼 수 있는 속도보다 더 숨 가쁘게 살아야만 문제없이 회사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힘들었고, 금방 지쳤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직장의 상황과 나에 대한 실망과 원망, 에너지의 부침이 하루하루 쌓여갔고결국 퇴사를 택했다. 성장이 더디고 성과를 내는 데 오래 걸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달리기 실력도 잘 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는 직장생활이 아닌데. 달리기에는 데드라인도 없고, 내 기록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어려운 상사도 없다. 그냥 나에게 맞는 속도로 뛸 수 있는 만큼만뛰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까지 성과와 성장에 의무감을 느끼며집착했을까? 어쩌면 난 퇴사를 한 지금까지도시원찮은 성과와 더딘 성장에 스트레스받던 직장인 시절에 갇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에서 맛보지 못했던 뚜렷한 결실과 성취감을 달리기를 통해얻어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달리기를 맨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때의 나는 기록이야 어떻든 개의치 않고 끝까지 해낸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스스로 무한한 응원을 쏟아부었다. 그거면 된다. 지금 나는 백수고 자유롭다. 직장도 없고 일도 없고 누군가에게 나의 잘남을 증명해야 할 의무도 없다. 늘면 느는 대로 늘지 않으면 늘지 않는 대로, 달리기가 주는 기쁨을 다시 한번 오롯이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