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푸근 Jan 09. 2019

30대 중반의 사랑이란

(2) 나의 시간 그리고 너의 안주

"최 과장이 올해 몇 살이지?"


신년 회식이라는 의미 없는 이벤트로 부서원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P부장은 내게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얼마나 그에게 들어왔던 것일까? 그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기억이 삭제되는 듯 그렇게 또다시 물었다. 나는 사회생활로 축적된 인내심으로 겨우 대답했다.


"36살입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이쿠 이런.."


그는 희극인의 기질이 다분했는데, 수년간 이어진 공연에도 최선을 다하려는 리액션과 성실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역량만큼은 칸 영화제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이 나만의 평가였다.


"우리 부서의 올해 KPI(Key Performance Index)는 최 과장의 결혼으로 하자구. 내 올해에는 적극 협조하겠네. 데이트가 있다면 언제든 바로 칼퇴해도 돼. 내 약속하지."


눈 앞에서 타들어가는 돼지고기만큼이나 내 속도 그렇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난 이 촌극의 엔딩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막막해지는 새해의 저녁 어느 날이었다.




P부장은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다. 평소에는 감정 표현에 서툴고 조용하지만, 과다한 음주 후에는 바겐세일 하듯이 발언을 쏟아낸다. 특히 다수의 분위기를 이끌 수 없는 입담을 가졌기에, 회식 자리의 대화 주제는 극히 한정되고 반복되어 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의 연애 또는 결혼에 대한 전망이었다.


더구나 술이 취하면 대학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과하게 챙기려는 경향이 있던 P부장은 홍보를 하는 건지, 비난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외줄 타기 화법으로 나를 표현하곤 했다.


"요즘 세상에 최 과장 같은 남자가 어딨나? 아주 세심한 친구야. 미술도 좋아하잖아. 그 뭐야. 고흐! 고흐 그림도 바탕화면이고."

"(모네야.. 바보야.) 부장님 그만하시죠 ㅎㅎ."


나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를 제지하려 하지만 그는 분노의 질주를 찍듯 말을 이어 갔다.


"최 과장은 근데 이상형이 어떻게 되지?"


나는 순간 당황했다. 20대 때는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의미 없는 번뇌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누구도 30대의 나에게 이상형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당황하며) 글쎄요..."


P부장은 이 같은 나의 대답을 들으며 노루를 쳐다보는 표범의 몸짓으로 말을 이어갔다.


"봐봐, 자신이 어떠한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거야. 이렇게 준비가 안되서야.. 어이쿠."


난 저 놈의 어이쿠를 또다시 듣고 황당했지만 나름 소소한 웃음이 나기도 했다. 만약 36살의 남자가 '제 이상형은 설현입니다'라고 말했다면 그게 더 나아 보였을까?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것일까? 글쎄, 나도 모르겠다.


Claude Monet


역시나 그날 P부장은 만취했다. 나는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는 동료들의 주장으로 P부장과 같이 택시를 탔다.


'아니, 잠실하고 노원이 어떻게 같은 방향이야.. 치사한 놈들..'


P부장은 연기에 모든 것을 쏟아냈다는 듯 잠을 자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나는 그의 아파트가 어느 단지에 있는지는 알았지만, 정확한 동/호수는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알고 싶은 않은 정보였다.


"부장님, 일어나세요. 다 왔어요."


P부장은 총을 맞은 사람처럼 기절한 듯 일어나지 않았다. 난감했다. 아파트 단지도 너무 큰 나머지 함부로 내릴 수도 없었다. 택시기사님은 답답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그분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보세요. 가족들 번호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P부장의 핸드폰을 찾았지만 화면은 잠겨 있었다. 난 순간 난감했지만 미드 CSI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난 그의 손을 들어 지문을 핸드폰에 문질렀고, 최신형 핸드폰은 모든 것을 만족했다는 듯 화면 잠금을 풀어주었다. 부장님의 자주 사용하는 연락처 1위는 '나의 아내♡'였다.


'이 형님.. 귀여운 구석이 있네.'


나는 자주 사용하는 연락처 5위가 '최 OO 과장'인 것이 소름 돋았지만 잊으려 애쓰며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수님은 너무 죄송하다며 몇 동 앞으로 오면 바로 나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분후 아파트 앞에서 나는 형수님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최 OO 과장입니다."

"(신사임당 톤으로) 어머, 죄송해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먹었지. (목소리 톤이 바뀌며) 안 일어나!"


그녀의 괴성 한마디에 P부장은 마법에서 풀린 백설공주처럼 잠에서 깼다.


"으... 어어어..."


P부장은 겨우 형수님의 부축을 받으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형수님은 범죄자를 이송하듯 남편을 들고 이동하더니, 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걱정 많이 해요. (옅은 미소로) 올해는 국수 먹게 해 줘요. (또 톤이 바뀌며) 똑바로 안 걸어 이 인간아."


사랑이 뭔지, 결혼이 뭔지, 그 날따라 유독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바보형 P부장.



https://youtu.be/KX4sVYTVx7A





매거진의 이전글 30대 중반의 사랑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