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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푸근 Feb 13. 2017

설날, 나의 공방전

(3) 그 옛날, 우리의 사랑



친척 누나에게 서현이의 사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9살로서 온갖 어른인척은 다하는 녀석의 사랑은 누구일까? 나는 갑작스러운 취조를 시작했다.


삼촌 : 서현아.

서현 : 응, 삼촌.

삼촌 : 너 요즘 누구 좋아하는 애는 없어?

갑자스러운 질문에 서현이는 고개를 들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이었지만 선뜻 기억나지가 않았다. 서현이는 3초의 침묵 후 대답했다.

서현 : 없어요. 그런 거.

나는 이 부자연스러운 문장에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되물었다.

삼촌 : 그럼 누구 잘 생긴 사람은 없어?

서현 : (유치하다는 듯 웃으며) 없어요.

하지만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뇌기능을 사용해보고자 했다.

삼촌 : 그럼 주변에 어떤 남자애가 제일 똑똑해 보이니?

서현 : (망설임 없이) 민준이.

나는 드디어 그놈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90년대 하이틴 스타 같은 이름이 아직도 있구나 하는 적대적 감정이 샘솟았다.

삼촌 : 민준이는 왜 똑똑해 보여?

서현 : 민준이는 바보 같은 애들이 싸워도 중간에서 잘 말리고 화해시켜요. 그리고 피아노도 엄청 잘 쳐요.

나의 조카는 '엄청'이라는 단어에 깊은 억양까지 추가하며 그를 칭송했다. 그는 송파구의 모차르트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뜩 어린 녀석들이나 어른들이나 악기는 참으로 좋은 역할을 많이 한다는 헛웃음 섞인 생각이 들었다. 삼촌으로서 나는 나름 호의를 베풀며 이들의 인연을 응원하고 싶었다.

삼촌 : 우리 민준이 마카롱 하나 사다 줄까? 서현이가 주면 되잖아.

서현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책장을 넘기며 성의 없이 말했다.

서현 : 안돼요. 버릇 들어.

이것이 나의 질문에 대한 9살의 대답이었다.




나는 서현이와 집에 돌아오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했었구나. 신비한 존재가 주변에 있었다. 그 존재는 딱히 인위적인 구석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알아갔고, 그런 시간들 속에서 좋아하는 감정을 만들기 시작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봤다. 내가 이렇게 누구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너무나 아득하여 보이지도 기억나지도 않았다. 서현이는 멍하니 고뇌하는 노인을 보며 말했다.

"삼촌 뭐해요?"

"응, 삼촌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

서현이는 갑자기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삼촌이 갈수록 이상해진다고 했어요."

나는 친척 누나라는 화상이 또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서현아, 너희 엄마는 모두를 싫어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해."

서현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엄마는 삼촌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친척 누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오랜 세월을 겪었지만 그녀는 그런 아름다운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녀에게 사회와 정치와 나는 분노와 절규의 대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구석구석 남아있는 친척들을 살폈다. 메뚜기 매형은 어느새 파드득 날아 집에 간 듯 보였고, 이모들도 대부분 이미 집을 떠나셨다. 남아있는 것은 집안에서 가장 쌘 두 언니인 큰 이모와 서현이 엄마뿐이었다. 큰 이모는 어린 시절부터 일찍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한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공장 여성근로자들의 대표까지 역임하셨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말론 브론도를 연상시키는 몸짓과 어눌한 억양으로 상대를 제압하곤 했다. 말수도 그다지 많지 않으셨다. 정정하자면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개를 훈육시키듯 맞았던 친척형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큰 이모께서 들어오는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앉아봐라."

나는 사형대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큰 이모는 나를 보며 다시 말씀하셨다.

"결혼은."

"네, 해야죠... 노력해보겠습니다."

나는 아직도 왜 내가 '노력해보겠습니다'를 붙였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회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비굴하게라도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큰 이모는 손에 쥔 곶감 한 개를 주무르며 말하셨다.

"언제까지 놀러 다닐 순 없어."

"예.."

그다지 놀지도 않았던 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추석에는 누군가 소개하길 바란다."

"네.."

나는 고개를 숙으며 모든 것에 순응하듯 말했다. 그때 우연히 본 친척 누나의 얼굴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그걸 느꼈던 것일까? 큰 이모는 친척 누나를 보며 한 말씀을 뱉어내셨다.

"까불지 말고."

친척 누나는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큰 이모의 쇼핑을 위해 어머니와 친척 누나가 모두 수행을 나가고 나는 서현이와 둘이 남게 되었다. 역시나 설날은 피곤한 것이었다. 초반엔 메뚜기 매형의 오두방정을 견뎌야 했고, 중간에는 9살의 어른스러움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말론 브론도 이모의 카리스마에 기만 죽었다. 나는 밀려오는 피로에 소파에 깊숙이 누웠다. 서현이는 시체가 된 나를 보며 물었다.

"삼촌은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없어. 그런 사람."

나는 피곤함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이쁜 사람은요?"

"아이고. 없단다 서현아."

"그럼 주변에 똑 부러진 여자는요?"

나는 순간적으로 이 대화가 어디선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이것은 내가 스타벅스에서 서현이를 취조할 때의 바로 그 대화였다. 나는 서현이를 급 노려보며 웃음 지었다. 서현이는 능청스럽게 나를 보며 말했다.

"모른 척해줄게요. 삼촌."

나는 이 시대의 동심과 어린이는 모두 멸망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https://youtu.be/Z0wBrJHd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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