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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Aug 25. 2023

야구로 인도차이나반도에 복음 심는 이만수 전 감독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를 전하는 스포츠 선교사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깨질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이라고 한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 포수이자 4번 타자 이만수 선수가 최초로 이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사라지기 전까지 영원히 박제될 기록이다. 이만수 선수는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로 입단해 16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0년간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이 시절 코치로 활약한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귀국 후 2007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수석코치를 거쳐 감독에 올랐고, 53년의 야구 인생을 살았다. 감독직을 내려놓은 뒤 사비를 털어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건너가 야구를 전파하고 베트남에 이어 인도차이나반도의 국가들에 프로야구의 씨앗을 심고 선교하는 비전을 실천 중이다. 또한 재능기부로 전국을 다니며 어린이와 청소년, 발달장애 아동을 만나 평생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고 생생한 삶의 간증을 전하고 있다.





아내의 전도로 크리스천이 되다


이만수 장로(인천은혜의교회)는 한양대학교 선수 시절, 친구 김시진(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승 투수)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알게 된 1학년 동년배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바로 지금의 아내인 이신화 권사다. 첫사랑에 빠져 열심히 구애해 3년을 데이트했다. 같이 교회에 가자는 아내의 권유가 종종 있었지만, “하루 네 시간만 자고 새벽부터 연습하는 내가 무슨 교회냐, 교회 갈 시간 없다”고 응수하며 회피했다.


이만수는 한양대 시절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 학교의 주전 선수이자 이미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돼 활약했다. 당시 국가대표를 이끈 김응용 감독이 밤에 숙소에 들어와 보면 새벽 1시에 이만수, 박종훈 두 명의 선수만 훈련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만수 선수는 매일 네 시간만 자고 새벽에 일어나 훈련하는 것을 선수 생활 내내 유지했다. 그러다 3학년 어느 날 결별 통보를 받았다. 아내는 3년 동안 전도했지만, 반응이 없자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심장이 쿵 떨어진 이만수는 절박한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계속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아내는 주일에 같이 교회에 가자고 했다.      

1982년 약혼식

그렇게 아내의 전도로 처음 교회에 갔다. 수많은 성도가 예배당에 가득 찬 모습에 낯설고 어지러웠다고 한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인생 처음 주일예배 시간을 경험하던 중에 콜링이 있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처음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일어나세요.” 이만수 선수는 무시하고 앉아 있었는데 옆에서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일어나라고 독촉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아내를 따라 예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새 생명 이만수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아프면 기도했고, 매일 새벽 4시에 깨어 하루를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시작했다. 야구에 입문한 중학생 시절부터 새벽에 일어나 연습하던 습관은 지금 장로 직분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는 데 소중한 일상의 패턴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가 연고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이사하면서 대구제일교회와 아멘교회에 출석했다. 아내를 만난 지 5년째 되던 해에 결혼했고, 하종이와 언종이 두 아들도 장성해서 신실한 배우자를 만나 모두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아내 이신화 권사의 사랑과 믿음    

 

이신화 권사는 이화여고 시절 채플을 통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군인인 이만수 장로의 가풍은 엄격했다. 무교였던 이만수 장로와 그의 가족은 이신화 권사를 만나면서 양가 집안 모두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되었다. 이만수 장로가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내의 기도와 사랑이 있었다.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뛴 삼성 라이온즈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선수가 되었을 때, 괴로운 마음을 참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 밑바닥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을 때,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온갖 긴장과 악평에 시달릴 때 이만수 장로는 기도했고 이신화 권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현숙한 여인의 조언으로 힘을 더해 주었다. 운동선수는 잘 먹어야 하는데 아내의 음식 솜씨 또한 일품이어서 이런 배우자의 내조를 받게 해 주신 하나님께 평생 감사하다.      


성지 순례 중 요르단에서 아내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 원정경기 중에도 이만수 감독은 주일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어느 지역이나 선수단 숙소 부근에는 교회가 있기에 지역의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불교세가 상당히 강한 삼성 라이온즈였지만, 양준혁, 이승엽, 성준, 이중화 등 후배들은 이만수라는 선배 덕에 함께 예배했다. 독실한 불자이며 고교야구 시절부터 무서운 선배인 장효조에게 용감하게 전도했다가 따귀를 두 대나 맞기도 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10년 만에 장효조 선배를 만났는데 뺨을 심하게 때리며 화를 내던 선배가 ‘만수야, 나 교회 다녀’ 하는 거예요. 저는 장효조 선배는 하나님도 전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 아들이 목사다’ 하는 겁니다.”     


이 감독은 평생 잘한 일, 가장 감사한 일 세 가지를 고백한다.

“첫째, 하나님을 믿은 일, 둘째, 아내를 만난 일, 셋째가 야구를 한 것입니다.”

프로야구 원년 스타, 레전드 중 레전드로 사랑받는 이만수 장로는 인생의 감사한 우선순위 첫째와 둘째가 하나님과 아내다.


은퇴 후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힘을 쏟으며, 라오스로 건너가 야구로 복음을 전할 때 언론과 야구팬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선택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스포츠 선교사로 인생의 후반전을 뛰는 이 감독을 전폭적으로 응원했다.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야구의 씨앗을 심기 위해 큰 비용을 투자했고, 버선발로 뛰며 야구용품을 모아서 컨테이너에 실어 보냈다.

대구상고 시절 홈런 친 10대 이만수


 “프로구단 감독은 화려해 보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지만, 감독이라는 이름 외에는 행복이 없어요. 늘 쫓기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기쁨이 없었죠. 그런데 재능기부와 봉사는, 하면 할수록 행복합니다.”     


지도자로서 역량을 인정받던 이 감독은 야구계의 여러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좁은 길을 택했다. 라오스와 베트남에 야구 보급에 나서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제 생각만 하고 벌어온 돈을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한번은 아내에게 “우리 이제 뭐 먹고 살아?”라고 했더니 아내는 “당신이 50년 넘게 야구하면서 주위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커요. 숟가락 못 들 정도 되면 얘기할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편히 좋아하는 야구로 기쁘게 복음을 전하세요” 하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스포츠 선교사로서 인생 2막을 사는 그의 곁에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일에 순종하도록 권면하는 아내의 기도가 있다.      



독종·헐크·빅스마일·한국의 베이브 루스, 그의 시련과 영광     


이 감독은 별명이 여러 개다. 아마추어 시절 누구보다도 독하게 연습한다고 독종으로 불렸고, 프로선수 시절 홈런을 칠 때마다 두 팔을 들고 환호하며 뛰는 퍼포먼스로 헐크라는 별명이 자주 언급됐다. 미국에서 감독 수업을 받을 때는 영어가 익숙지 않아 늘 크게 웃으며 알아듣는 척했더니 빅스마일로 불렸다. 이 감독을 소개하는 미국 기사에는 한국의 베이브 루스(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통하기도 했다. 팬들에게 가장 크게 알려진 별명은 헐크다. 이 감독도 이 별명에 애착이 있어 야구 재능기부 재단 ‘헐크파운데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 몹시 고통스러웠다. 선수 은퇴 후를 위한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다. 무작정 도피성 유학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에서는 이름난 야구 선수이며 어디를 가도 알아봐 주었지만, 미국에서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으로 인종차별 대상일 뿐이었다. 에이전시의 소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싱글A팀인 킹스턴에서 타격코치를 시작했다. 마이너리그 중에서도 하위 리그에서 언어, 음식, 문화의 장벽에 부딪히며 거구의 어린 선수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몇 번을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출애굽기 14장 13절, 홍해와 바로 왕 사이에서 두려워 떨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로 인내하게 하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5년만 마이너리그에서 포기하지 않고 견디다가 6년 차부터 메이저리그 코치로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허황된 꿈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기회는 왔다. 팀 매니저가 3루 작전코치를 맡긴 것이다. 팀은 지고 있던 경기였지만, 이 감독은 3루에서 열정적으로 손뼉 치며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Go!! Go!!”를 외쳤다. 패색이 짙은 조용한 야구장에서 그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 야구계에 그의 존재를 처음 알린 일화였다.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한국의 홈런타자임을 믿지 않고 조롱하는 현지 코치와 선수들이 공 열 개를 던질 테니, 홈런 한 개만 쳐보라고 시험한 일도 있었다. 타격 훈련을 쉰 지 6개월이 넘어 불가능한 시험이었으나 이 감독은 기도했다. 하나님은 한 개도 치기 어려운 홈런을 여섯 개나 치게 하는 힘을 주셨다. 결국 마이너리그를 벗어나는 그의 목표는 당겨졌다. 불과 3년 차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포수코치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것이다. 그가 코치로 활동하던 2005년 화이트삭스는 8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카고의 120만 명 인구 중 100만 명의 인파가 모여 카퍼레이드를 맞이했고, 시야를 가릴 만큼 많은 색종이가 시카고 거리를 수놓았다. 시카고 거주 동포들은 카퍼레이드 선두에 있는 고국의 슈퍼스타 이만수로 행복해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가 가장 힘든 자리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일화다. “제가 코치할 때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선수 마크 벌리라는 신인 투수가 있었어요. 아들뻘이지만 친구로 지냈습니다. 마이너리그의 후보였다가 미네소타 돔구장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에 임시로 마운드에 올라가게 됐어요. 마크가 제게 와서 ‘만수야, 너무 긴장된다. 어떡하면 좋냐?’며 긴장하며 묻더군요. ‘포수가 사인하면 한가운데로만 던져라. 잘 해낼 거야’ 격려해 주었더니 그날 마크는 아주 잘 던졌습니다. 마크는 이후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메이저리그 투수로 활약하다 완봉승을 해내는 최고 선수로 성장했죠. 은퇴 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오른 선수가 됐습니다. 당시 그에게 어설픈 영어로 전도했어요. 계속 알았다고만 하며 반응이 없다가 1승을 하면 교회에 다니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마크는 1승을 한 뒤에도 10승을 하면 교회에 가겠다고 번복했다. 메이저리그에서 10승 투수는 흔치 않다. 그런데 다음 해 마크는 10승을 해냈다. 결국 이 감독의 전도로 못 이기는 척 같이 교회에 갔다.

“미국의 마이너리그에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많은데 메이저리그로 갈수록 유명해지고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으면서 교회를 멀리해요. 마크는 저와의 약속을 더는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응했죠. 그런데 얼마 후 백인 노부부가 찾아왔어요. ‘만수 리? 마크 벌리의 부모야. 우리 집은 신실한 가족인데 마크가 야구하면서 교회를 안 다녔어. 그런데 너 때문에 교회 다닌다니 감사해서 왔어. 탱큐!’”

이 감독은 서툰 영어로도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국내 무대로 복귀해 SK 수석코치를 맡던 2007년, 전무후무한 ‘팬티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 감독의 미국 경험이 만든 퍼포먼스다. 미국 야구장은 매 경기 5만 명의 관중이 차는데 인천 문학구장은 그 위용에 비해 관중 수가 6천 명도에 그쳤다. 그는 사담으로 “만원 관중이 차면 팬티를 입고 야구장을 돌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그런데 그 말이 뉴스 중계팀에 들어가 대중에게 일파만파 퍼지고 말았다. 본인과 가족 모두 당황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관중은 점차 늘어 KIA 타이거즈전에서 문학구장의 3만 400석이 모두 찼다. 이 감독은 약속을 쉽게 깨트리는 일이 다반사인 한국 사회가 약속을 지키는 정직한 사회로 바뀌기를 소망하며 창피함을 무릅쓰고 공약을 지키기로 했다. 5회 말이 끝난 뒤 자신의 공약을 지지해 준 팬 22명(이 감독의 선수 시절 등번호로 영구 결번)과 함께 선물 받은 엉덩이 팬티 차림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이 감독이 멋지게 약속을 지킨 모습에 아내와 두 아들이 먼저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일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됐다.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이 감독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러 번 체험했다. 하나님은 최정점에 올라가는 성공을 허락하시면서도 늘 그를 낮추셨다.

“한국 야구인으로서 큰 영광인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도 열흘만 지나면 감흥이 사라져요. 세상 욕망에 휘둘리면 기쁨이 없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가 가장 힘든 자리기도 해요. 그런 생활을 해온 제게 하나님은 인도차이나반도를 보여주셨어요. 야구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높은 자리까지 올려 훈련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나라를 바꾸는 스포츠     


이 감독은 53년 야구 인생에서 SK 와이번스 감독 하차 후 지난 10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프로구단 감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은퇴하고 재능기부로 봉사하면서 거의 전 재산을 라오스에 투입했다. 많은 이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명예, 인기, 경제적 안정은 없어도 그에게 참 기쁨은 야구를 통해 전하는 복음에 있다. 모든 열정을 쏟았고, 많은 자원봉사자를 만났으며, 실업가들을 찾아가 고개 숙여가며 기부금을 요청했다.      


이 감독은 라오스에서 스포츠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했다.

“야구라는 단어가 없던 나라에 이젠 협회까지 생겼어요. 공산국가인 라오스 정부가 2년 동안 외면했지만,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게 스포츠’라고 강조한 끝에 결국 지원을 약속받았죠.”     


라오스에 야구협회를 만들고, 대표팀을 결성해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2020년에는 염원하던 야구장이 멋지게 완성되어 라오스 최초의 국제대회가 열렸다. 이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러 나라에 야구와 함께 복음이 들어가도록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 야구팬들에게 받은 사랑은 야구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과정으로 고백한다.      


“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일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오스와 베트남의 열악한 환경에서 야구 선수를 키우고 우리나라 3군 정도 실력의 팀으로 만들어 매년 한국에 초청해 친선대회도 열고 있어요.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한국 어디를 가도 환영받고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국제후원 활동이 가능했죠.”

    



동남아에 야구를 전파하는 것은 메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금세 물이 증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감독은 끊임없이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렸다. 라오스와 베트남의 메마른 땅에 생소했던 야구가 자리 잡고 복음이 심어져 생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제 인생 끝까지 메마른 땅에 마중물 역할을 계속해서 반드시 결실을 맺고 싶습니다. 평생 야구 한길로 달려오며 남편과 아빠로서 부족함이 많아요. 사랑하는 가족과 며느리, 귀여운 손자를 돌보며 건강하게 노년을 맞이해야 하는데 여전히 야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쓰고자 하시는 곳에 달려갈 때 사랑하는 가족 또한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이 감독은 야구를 시작한 뒤 매일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헐크의 일기는 야구 일지이면서 그의 신앙의 행보가 기록된 믿음 일지이기도 하다. 그 일기의 한 토막에 행복의 정의가 담겨 있다.


“50년이 넘었어요. 경기하다가 슬럼프가 와도 매일 일기를 썼어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요. 지금도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 지르고 신나게 야구를 할 것만 같은데 어느새 6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어요. 야구로 인해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열심히 살 수 있어서 저는 행복한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_글 황교진 / 신앙계 2023년 9월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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