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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Sep 04. 2020

아이 앞의 섬-1

섬에서 자라난다.

아이와 바다를 곁에 두고 살 줄은 몰랐다. 제주에 내려온 첫 해, 유난히 눈이 많았던 겨울을 보냈다. 아이를 안고선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이 며칠이나 이어졌다. 눈 내린 섬엔 갇힌 동시에 열려있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들은 나목 위의 눈꽃이며, 하늘과 땅의 경계며, 바다 위와 그 속 어디 즈음에 있었다.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끝까지 마음 써주는 섬 사람들도 그러했다. 여기저기서 아이 손에 귤을 쥐어주는 겨울을 지나고 나니, 제주에 정이 묻어버렸다. 작고 오동통한 손엔 밤낮 할 것 없이 새콤달콤한 시트러스 향이 묻어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이 섬에 살고 싶어졌다.



눈이 거의 다 녹은 뒤엔 헤아릴 수 없고 아득한 것들만 높은 산에 남아 있었다. 꽃이 바다처럼 밀려드는 봄이 금새 찾아왔다. 유모차를 끌고 백화점을 도는 대신 가끔은 구름을 따라다니며 낮잠을 재운다. 노을이 예쁘면 중산간으로 내달린다. 셋이서 빵과 커피, 우유를 나눠먹고 잔잔한 바닷가를 한참 서성이는 날도 있다. 제주에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아이에게 알려주기 편하다. 아이가 먼저 알아보기 때문이다. 예의범절이나 도구처럼 힘들여 설명할 필요 없다. 바다와 숲, 언덕과 초원에 들어서면 된다. 여기엔 커다랗게 이름 붙이긴 어려워도 찬연스러운 부분이 항상 있다. 아직 말할 줄 모르는 아이는 무어라 무어라 옹알거린다. 신이 나서 엄마, 아빠를 외치며 작은 다리로 힘차게 걷는다. 만져보고, 냄새 맡고, 바라본다. 넘어져도 금새 일어나 손을 턴다. 눈부시고 가슴 뜨겁다.


자연 앞에선 미사여구 보다 그림책 구절이 먼저 튀어 나온다. 전에는 상상 할 수 없던 구연동화 체 목소리가 꽤 자연스럽다. '아가야, 아가야. 하늘 좀 보세요. 뭉실뭉실 구름이 얼굴 같아요.' 그래, 어떤 날의 하늘은 정말 뭉실뭉실, 두둥실 그 자체다. 한라산에 눈을 뿌리고 온 구름 떼가 바삐 바다로 길을 떠나던 때에, 나와 내 아기는 집에 콕 박혀 간식을 나누어 먹고 또 먹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좋은 시절이 뭉실뭉실 흘러간다. 내 유년기엔 없던 풍경이 아이 앞에 종종 펼쳐진다.


아끼는 곳 중 하나는 장터다. 옥수수와 호떡을 사이 좋게 나눠 먹으며 오일에 한 번 서는 장을 돈다. 낫이나 물질 도구 따위를 쨍하게 만들어내는 대장장이가 건재한 2018년이다. 아이는 뻥튀기 기계 앞에서 놀라면서도 뻥 과자는 공으로 잘도 받아낸다. 아무리 봐도 구별하기 힘든 묘목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흥분된다.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가장 적확한 단어다. 형형색색 봉지를 손목에 꿰고 순댓국과 막걸리에 군침 흘린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야쿠르트 리어카와 꽈배기 좌판에 매달려 있다. 도시를 오래도록 사랑했지만, 지금 난 이런 게 좋다.



도시를 떠나오고 언제부턴가 새벽 잠이 줄었다.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적막해서 더 소중하다.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올 때가 좋다. 세상 모든 게 섬을 떠나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집 앞은 돌담과 귤 밭이다. 온갖 벌레가 집안으로 기어들지만, 매일 봐도 생경한 풍광을 포기하긴 어렵다. 며칠 전엔 밭 주인이 키 큰 방풍림을 베어 버려 멀리 바다도 보인다. 자연 속에서도 육아의 한계와 기쁨은 현재진행형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아이는 떼를 부리고, 나는 늘 피곤하다. 그걸 아는지 예쁜 짓은 진화해 나를 달랜다. 매일 내 밑바닥을 마주하면서도, 두 살 배기의 시간을 위해 몸과 마음을 솟아낸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몸 구석구석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들을 위하여. 훗날 아이가 제주는 어떤 곳이었냐 묻는다면,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할까. 너의 세계가 바로 이 섬에서 시작됐다는 그 이야기.


여행자, 넓은 바다를 누비는 주인공

그대는 기억이 희미해진

다른 나라의 신화를 가지고 오지

                                  스탠리 쿠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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