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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POPUP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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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성원 Dec 26. 2019

새로운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도시 운영 패러다임

팝업시티

1980~2000년에 태어난 세대로, ‘밀레니얼’이라 분류되는 젊은이들은 교외가 아닌 도심 안에 거주하면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고, 리무트 워크와 같은 문화가 확산되면서 재택근무도 늘고 있다. 아울러 원하는 지역에서 ‘한 달 살기'와 같은 수요가 나타나며 관광과 거주의 개념이 혼용되고 있는가 하면, 3D프린터 기술 등으로 인해 하드웨어 생산까지도 도심 내에서 가능한 사회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다. 수요 측면에서 용도의 혼합이 거세게 나타나고 있는데, 현행 도시계획 체계는 이 같은 수요의 변화를 받아낼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이 같은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소개하고, 도시 운영을 위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 한다.


호텔이 공유주택으로 바뀐다

서울 종로에 있는 베니키아 호텔이 지난 5월 용도를 임대주택으로 바꿨다. 2015년 12월 개장해 2년 이상 호텔 영업을 했지만 영업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인 관광객이 물 밀듯 들어오던 때, 호텔을 지으면 용적률 특례를 주던 제도 탓에 나타난 호텔 과잉공급 현상, 현지인들의 생활을 그대로 경험해 보고 싶어하는 최근의 관광 트렌드 등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이 호텔을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호텔이었던 용도로 성공하지 못한 공간을 주거 용도로 바꾸는 작업이다. 1,6호선이 교차하는 동묘앞역과 1,2호선이 가로지르는 신설동역 중간에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에 속한 데다 광화문과 종로가 가까워 1인가구 주거지로서는 꽤나 좋은 입지 아닌가.


호텔을 공유주택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최근 등장하는 공유주택과 호텔이 판박이처럼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호텔의 로비와 각종 부대시설은 공유주택의 공유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고, 호텔 객실은 1인 가구가 살기에 매우 적당한 크기다. 실제 550여명이 거주하는 영국 런던의 공유주택, 올드오크의 구조는 호텔과 유사하다. 베니키아 호텔은 신혼부부용 주택 2호를 제외하고 총 236개의 객실이 1인가구용 주택으로 바뀐다고 한다. 지하 1‧2층과 지상 2층에는 체력단련실과 북카페 같은 공유공간이 들어선다.


이 같은 용도의 기민한 변화. 그것이 바로 요즘처럼 기존의 질서가 뒤바뀌는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도시의 적응 방식이다. 필자는 그와 같은 적응 방식을 갖춘 도시를 ‘팝업시티'(음성원, 팝업시티, 2018.11.27. 이데아)라 부르고 있다. 팝업시티는 외부 환경에 의해 소비자 수요가 빠르게 변화할 때, 공간 운영자가 손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시 공간의 용도 전환을 좀 더 유연하게 조정하자는 주장을 담은 단어이다. 베니키아 호텔이 호텔이라는 용도를 재빨리 포기하고 이른바 공유주택으로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한 서울시의 정책은 서울이 ‘팝업시티'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주거지에서 현지인과 함께 동네를 경험하려는 관광의 수요가 확대되는 것과 함께 주거 수요는 과거와 달리 도심에 몰리고 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는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어메니티, 즉 식당과 카페, 극장 등의 문화시설, 인적 네트워크와 각종 스터디 및 모임 등을 가까이에서 즐기려 하기 때문에 도심 속에서 거주하려는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심지어 요즘 젊은 층은 자녀를 갖지 않은 1~2인 가구가 많기 때문에 굳이 학교 중심의 전통적인 주거지, 아파트단지 등에 거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직장 바로 옆에서 통근의 괴로움을 덜어내고 그 시간을 다양한 경험으로 채워넣으려 시도하고 있다. 이 같은 수요의 변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도심 오피스와 호텔의 공실률이 높아지는 상황은 그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베니키아의 사례처럼 20년 넘게 지역 대표 호텔로 자리매김해 왔던 서울 성북구의 홀리데이인 성북이 동덕여대 기숙사로 바뀌었고,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의 다이너스티 관광호텔은 베니키아와 똑같이 임대주택으로 재건축 중이라고 한다. 이미 시장은 움직이고 있다.


앞서 작년 10월1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도심 업무빌딩 일부에 공공임대주택이나 분양주택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매일경제, 박원순 서울시장 "종로·광화문 도심빌딩에 공공주택", 2018.10.01.) 이미 서울시는 업무와 주거의 적극적인 혼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 같은 용도의 혼합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도시계획 체계, 이른바 ‘팝업시티'가 새로이 도입되어야 한다. 팝업시티는 한 공간에서 용도가 얼마든지 혼합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도시계획 체계를 세우는 개념이다.


서울시는 업무용 빌딩을 새로 지을 때 임대주택을 섞어 넣는 수준으로 이런 제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팝업시티의 개념을 서울에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자산관리 회사인 로위 가디언(Lowe Guardian)이 2017년 진행한 ‘셰드’ 프로젝트는 오피스 빌딩의 공실 부위에 거주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셰드는 이케아 가구처럼 스스로 쉽게 조립할 수 있는 조립식 ‘프리패브’ 집을 비어있는 오피스 공간 안에 집어 넣는 방식으로 오피스 공실을 해결하고, 동시에 도심 안에서 거주하고자 하는 밀레니얼 1인 가구의 수요를 충족시켜 보려 하고 있다. 임대료는 주변 시세보다 절반 정도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렇게 할 경우 공실로 인한 건물주의 손실을 일정 수준 만회하고, 주거비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들의 니즈도 일정 부분 충족시킬 수 있다.


2010년 미국 마이애미 해변에 지어진 1111링컨로드라는 이름의 주차빌딩은 애초 설계 때부터 주차만을 염두해 두지 않았다. 이 건물의 탁 트인 넓은 공간은 결혼식과 같은 파티 공간, 대규모 요가 수업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는 운영자의 노력에 따라 공간 활용도가 극대화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정 단일한 용도가 쭉 이어지는, 아니 처음 정해둔 그 용도로만 써야만 하는 경직적인 제도는 현재 등장하는 다양한 니즈를 소화하기 어렵다. 이제 도시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를 바꿔야 할 때가 됐다.


도시의 회복탄력성 강화하는 팝업시티

팝업시티 시스템은 도시의 유연성을 강화한다. 예컨대 2012년 7월 도입된 ‘관광숙박시설 확충을 위한 특별법’에 따른 ‘호텔 용적률 특례' 제도는 갑자기 몰려 들어오던 중국인 관광객을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지만, 건축에 소요되는 시간 탓에 정작 몰려오던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호텔이 완공되던 시점인 2017년 ‘사드 논란'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특혜를 받고 지어진 수많은 호텔들이 공실에 시달리는 상황을 불러 일으켰다.


만약 당시 우리 사회가 팝업시티 철학에 맞게 에어비앤비와 같은 숙박공유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면, 몰려오는 관광객의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테고, 수요가 끊기더라도 원래의 기능인 주거용으로 되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충격이 덜해 회복탄력성이 높은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공실이 많은 호텔은 청년들을 위한 공유주택을 좀 더 쉽게 전환시키고, 서울 도심지에 공실로 남아 있는 많은 오피스를 공유주택 또는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면 굳이 새로운 건축물을 짓지 않고 기존 자원의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팝업시티 방식의 접근법은 친환경적이다.


팝업시티 시스템은 도시재생에도 활용할 수 있다. 도시재생이란 원래의 용도가 다 한 동네에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고, 그 용도에 맞게 건물과 동네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이다. 잘 활용되지 않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바로 팝업시티라는 점에서 팝업시티는 도시재생의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수요를 쉽게 찾아내기 어려운 쇠퇴한 동네에서 다양한 종류의 용도를 ‘팝업'시켜 실험을 할 수 있다면 ‘정답'을 찾기가 좀 더 쉬워질 것이다.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의 취향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성장 시대,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프라 투자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투자되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국 사회는 이처럼 공간 활용도를 높이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신도시 개발 등으로 인프라를 분산시키는 것보다 ‘콤팩트 시티' 전략으로 인구를 한 데 모아 인프라 투자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점점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인구가 전반적으로 줄고 있고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인프라 투자의 효율성이 점점 떨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콤팩트' 시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좀 더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용도를 유연하게 등장시키는 팝업시티의 전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좀 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인프라의 활용의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용도의 혼합이 제공하는 편익

모더니즘의 도시계획 체계에서 볼 때는 팝업시티가 거칠고 혼란스러우며 규칙적이지 않다며 불안한 시선을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밀레니얼이라는 새로운 인류는 이전과 다르게 도시를 소비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집에서 근무를 하는 일은 꽤나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있고, 심지어 집에서 3D 프린터를 이용한 제조까지도 가능해 진 시대다. 외곽으로 벗어났던 제조업은 컴퓨터 디자인과 3D 프린터의 발전과 함께 점점 다시 도심 속으로 재진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밀레니얼은 여행을 떠나더라도 ‘현지인처럼 살아보기(live like a local)'를 위해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남의 집에서 살아보려 한다. 이미 관광과 거주의 벽은 점점 허물어 지고 있다. 


이 같은 뒤섞임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작은 도시공간 안에서 좀 더 밀집해 모여 살면서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활발해지고, 그것은 저절로 혁신의 토대가 될 것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교류하면서 얻는 ‘유레카'의 순간이 모여 혁신을 가속시킬 것이다. 밀레니얼에 장착된 새로운 ‘감각기관'인 스마트폰은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 그 트렌드를 빠르게 확산시킬 것이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쓴 제인 제이콥스는 이미 오래 전, 용도의 혼합이 가진 장점을 이렇게 말했다. “도시 구역들은 2가지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여서 밤낮으로 상이한 시간에 상이한 목적의 사람들을 끌어와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도 한국과 비슷한 일을 앞서 겪고 있으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 정비도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일본 정부는 집 근처에서 일할 수 있는 ‘직주근접' 환경 만들기에 나서 주택가에 공유사무실 및 상업시설을 마련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직주근접"에 규제 완화... 주택지에 공유 사무실, 2019.01.12. ) 이 규제 완화를 통해 일본 사회는 그간 생산성 저하를 초래해왔던 통근 문제 등을 완화하고 여성과 고령자의 노동 참여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트렌드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에 적응하기에 공간의 용도 변화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서울시가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여전히 행정의 벽이 높고, 용도 변화로 큰 혜택을 얻게 되는 이들에 대한 이익 배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구획을 철저하게 나눴던 모더니즘 관점에서의 용도의 혼합에 대한 삐딱한 시선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필자 소개>

음성원 도시건축전문작가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경관생태학을 연구하였으며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겨레와 문화일보에서 약 12년 간 기자생활을 하며 도시계획과 커뮤니티, 젠트리피케이션 이슈 등에서 주목할 만한 기사를 써왔다. 2017년부터는 커뮤니티 기반 플랫폼, 에어비앤비에서 대외 커뮤니케이션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도시의 재구성>, <팝업시티>, <시티오브뉴욕>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현재는 매일경제신문에 ‘도시와 라이프'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 글은 (사)대한건축학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 '건축'의 2019년 8월호 특집 포럼 '공-'에 실린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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