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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Feb 05. 2021

심야괴담회의 뿌리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7.

옛날 옛적에 무서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또가 부임해왔다. 때마침 그 고을에 사는 그림 그리는 화공이 죄를 지었는데, 사또는 아주 무서운 것을 그려와서 벌벌 떨게 만들어주면 용서해줄 뿐 아니라 큰 상금을 내리겠노라고 했다. 화공은 귀신이 나온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귀신을 그려왔습니다. 에이, 이게 무엇이 무섭다고 그러느냐, 도로 가져가라. 사또, 상엿집에 가서 불구덩이 지옥에서 타는 사람들을 그려왔습니다. 너는 이게 무서우냐, 더 무서운 것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치도곤을 내릴 것이야. 모든 것을 체념한 화공이 길을 가다 주막에 들렀는데, 주막 주인은 한사코 재워주기를 거부했다. 화공이 설득하자, 잠은 재워주되 밤이 되어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 밖을 내다봐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이윽고 밤이 되고 소리가 들리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화공은 장지문에 구멍을 뜯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흉측하게 생긴 여귀가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는데 그 광경이 소름이 돋도록 무서웠다. 크게 놀란 화공은 재빨리 먹을 갈아, 공포의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화공은 그림을 챙겨 동헌으로 나가 사또에게 내보였다. 사또는 이번에도 못마땅에 하며 그림을 펴 들었다. 그 순간, 그림에서 튀어나온 여귀의 얼굴이 사또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 <전설의 고향> '괴화'편. 기억에 의존해서 재구성.




<심야괴담회>가 방송되고 포털 사이트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일본 예능 <마츠모토 히토시의 오싹한 이야기>를 베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윤똑똑이 같은 평이지만 눈썰미는 있다." 아마 촛불이 나오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니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카피판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방송국 사람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보통이요, 가끔은 지성마저 의심받는다. 방송이란 누구나 숟가락을 얹기 좋은 문턱이 낮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집에 TV가 있고, 프로그램에 한 말씀씩 얹을 수 있다. 다만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방송국 어르신들은 백 마디를 얹으며, 방송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그에 천 번을 더 고민한다는 사실은 쉬이 잊히고 만다.


유감스럽게도 <심야괴담회>는 기존 프로그램의 카피가 아닌 나의 오리지널 기획이다. 박근혜 정권이 나를 주조정실에 몰아넣어 '염매'로 만드려고 했을 때, 괴담에 대한 오랜 애호와 방송 경력이 끝나버렸다는 체념과 회한이 증류되어 나온 산물인 것이다. 이런 구질구질한 회고담은 앞서도 여러 번 언급했다. 고린도 전서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도 '공포'를 주제로 온갖 창작물들을 뒤섞어, 앞서의 표현대로 '증류'해낸 것이다.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기획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다. 고마운 물음이지만 기분 좋으라고 하는 얘기 같다. 공포 프로그램이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고 처음 시도된 바도 아니었기에 그렇다. 다만 방송에서 괴담을 3,4분가량 줄줄 읊었을 때, 콘텐츠 복마전에 놓인 시청자들이 꾹 참고 들어줄 것인가에 대한 자기 확신이 다른 PD들보다는 많았던 것 같다. 또 시청자들이 무엇을 좋아할지에 대한 관심보다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이 과연 행복한가 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 프로그램은 실현될 수 있었다. <심야괴담회>를 만들면서 행복했는가? 물론이다. 가끔은 공모 괴담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래서 순간의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책장을 덮은 적이 있다. 심사 과정에서 작가님들과 서로 '멕이면서' 토론하는 과정은 얼마나 즐거운가. 그다음부터는 모든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불면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심야괴담회>의 모티브를 준 작품은 역설적으로 경쟁사인 KBS의 프로그램, 바로 <전설의 고향>이다. 여기에 KBS <전설의 고향>의 제작을 자극하게 만든 공전절후의 MBC 라디오 드라마 <전설 따라 삼천리>가 덧대어져 있다. 어릴 적부터 <전설의 고향>의 열성 팬이었던 내가 꼽은 레전드 에피소드 중에 '괴화'라는 작품이 있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故 김순철 씨가 사또로 나오고 백윤식 씨가 화공으로 나오는 작품이었다. 간략한 내용은 앞에서 소개한 바다. '더 무서운 것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보상하겠다.' 괴화의 주제가 이 기획의 기본 줄기다. 여기에 서양의 영매들이 벌이는 강령회의 형식으로 출연자들을 배치했다. 처음에는 가운데에 '위저 보드'를 도입해서 괴담을 말할 사람을 자동장치로 지적하는 방식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치의 제작 단가가 예산을 초과했고, 장치를 추가하면 모니터를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강령회의 원탁 형식만 빌리도록 했다. 촛불과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괴담을 말하는 방식은 일본의 백물어(햐쿠모노가타리)에서 차용했다. 백물어는 일본 에도시대의 '쇼코쿠 햐쿠모노가타리'에서 출발해, 오카모토 기도의 '청와당 괴담회'에까지 이어지는 일본 전통의 괴담 향유 방식이다. 우리 프로그램이 일본 예능을 베꼈다는 주장은 아마 이런 방식만 보고 피상적으로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프로그램과 일본 예능 프로그램이 같은 일본 고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본 프로그램의 존재는 기획 단계에서는 전혀 몰랐다. 오히려 한국 예능 프로그램 KBS <안녕하세요>와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이 좋은 참고자료였다. 여기에 오디오 드라마 <전설 따라 삼천리>를 배합해서 썰과 구전으로 소비되는 현대판 전설들을 찾으려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기획에서 원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그 틀거리를 고민하는 법을 배웠고 <썰전>이나 <알쓸신잡>과 같은 토크 중심의 프로그램에서 영상을 우선시하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을 버리고 다른 형식을 고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를 배가하기 위해 재연은 피할 수 없었지만 보다 독특한 장치를 더 고민하기로 했다. <세계의 유령 대백과>라든가, <괴기 랜드>의 경우 이시하라 고진, 미즈키 시게루 등 조악한 일본 해적판 일러스트들이 더욱 괴기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을 상기하고 일러스트를 추가했다. 그리고 내가 애독하는 채널인 <스톡킹>을 보면서, 유튜브 채널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5분에서 10분 정도의 이야기는 편집을 적절히 한다면, 심지어 원 테이크라도 참고 들어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예산이 없다. 재연을 찍을 수 없다. 정작 재연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유치한 효과를 거둘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재연을 최소화하고 일러스트와 음향 효과를 추가하되, 클라이맥스에서만 사용한다.


무조건 사람들에게 먹힐 것이라는 확신이 있고, 곧바로 현실에서 증명이 된다면 어째서 수많은 방송인들이 밤을 밝혀야 할까? 선공개 영상부터 악플이 달리고 자신감은 급전직하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너는 잘 될 것"이라는 격려보다 내게 더 큰 위안이 되었던 말은 "어떤 일을 해나갈 때, 나는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얘기보다 망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어느 심리학자의 트윗을 보고 나서다. 가장 큰 두려움이 모두 미래에서 오는 일이라면, 현재에 더욱 집중해야 하고, 나쁜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은 이제 과거가 되었으므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오로지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 그 현재의 최선들이 켜켜이 쌓여 미래를 구축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모두 돈 벌러 나가고 집 안에 혼자 덩그머니 남아 있을 때, 나를 괴롭히던 두려움들. 그리고 그 두려움의 형체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결과를 이룬 것이 '심야괴담회' 같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 프로그램과 연이 맞닿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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