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인생에 비유하는 일들이 많다. 각기 아홉 번의 수비와 공격이 이어지는 동안에 온갖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이 응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놀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고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기에 우리는 야구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야구를 주제로 한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흥행한 이유도 공의 향방이 주제가 아닌, 인간과 또 다른 인간 사이의 관계 맺음이 신선한 소재를 통해 드러나서다. 그래서 그런지 MBC 스포츠플러스 <스톡킹>을 보면서 방송일, 특히 PD의 일이 야구와 유사한 면이 많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타순에 의해 일이 돌아오고, 드물게 그랜드슬램을 터뜨리지만 가끔은 진루타에 만족해야 한다. 삼진을 먹고 물러나거나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입스를 입고 제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시즌과 비시즌이 있고 비시즌에 무엇을 했느냐가 시즌을 규정한다. 기존의 실력에 못지않게 멘털이 중요한 요소다. 모두가 열심히 하지만 또 모두에게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야구선수들의 성장과 좌절이 한 편의 드라마를 이룸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통찰을 얻게 된다. 요즘 새삼 와닿는 얘기는 기아 타이거즈 최원준 선수의 일화다. 최원준 선수는 타이거즈 타선의 주축으로 성장해서 안타와 도루를 책임지고 있다. 원래부터 잘했느냐, 원래는 잘했다. 하지만 프로에 와서 한동안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타격 재능을 갖춘 선수로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초반에 인상 깊은 플레이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해가 갈수록 실망스러운 모습만 거듭 보여줬다. 기대가 컸기에 팬들의 실망도 컸다. 그러던 최 선수가 어느덧 타선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최 선수는 그 이유를 코치진의 지도에 따라 여러 번 타격폼을 수정했지만 결국 잘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폼을 되찾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회사를 하나의 프로야구 구단으로 본다면 임원들은 구단주와 프런트로, 보직자들은 감독과 코치진으로, PD들은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선수의 역할은 무엇인가? 야구를 잘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하면 구단에 승리를 안겨준다. 그러면 프런트와 코치진의 역할은 무엇인가? 선수들이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그리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도와주는 것이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PD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선을 다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채널 간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보직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PD들이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그리고 방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도와주는 것이다. 타격폼이 중요한가, 아니면 타격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배팅 케이지 신설이 더 중요한가. 유능한 코치진과 프런트라면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보직자들을 보면 프로그램 향상과 타사와의 경쟁을 위한 여건 마련과 시스템 개선보다는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에 더 신경을 쏟는 것 같다. 왜 이 컷 다음에 이 컷을 넣었느냐, 왜 에피소드 순서를 이렇게 했느냐, 등등.
선수가 타석에 섰다면 타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줘야 한다. 공이 날아오고 배트를 돌리려는 순간, "너는 왜 상체가 먼저 나가니?"하고 지적해봤자, 선수든 팀이든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선수는 어느덧 지적에 길들여져서 일구 일구 집중해야 할 타석에서 벤치의 눈치만 보기 십상이다. 그리고 눈치를 보는 선수는 자기 몫의 플레이를 하지 못하며, 결국에는 경기를 망치고 만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PD라는 소경영주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사람을 다룰 때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시를 내리고 그 지시가 불러올 효과를 예측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그 효과가 상반될 수 있기 때문에 늘상 선택에 직면한다. 꼼꼼하게 깨알 같은 지적사항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호승심과 사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지원하려면 관리자는 가끔 눈을 감고 있어야 할 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소위 '마이크로 매니징'이라고 불리는 사사건건 참견하고 간섭해서 수정하는 일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면 사람 관리에 지금 같은 호시절은 다시없을 것이다. 현미경 같은 눈으로 녹화본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잘 제작된 노트 툴로 'To Do List'를 만들어서 회람하고 체크하고 놓치는 부분을 노트툴로 다시 기록해서 수정하고 반복하는 일. 이런 일이 경영의 본질이라면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경영자는 별로 없다. 모든 경영자가 승리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은 완벽한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경영자들이 실패한다. 왜냐?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인간의 정신은 천공기에 찍힌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타인에 대한 통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단시간의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결과들을 놓치게 된다.
가끔 휴먼 다큐멘터리를 오래 해온 PD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나는 그에게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였을까, 곧잘 생각하곤 한다. 프로그램에 인생을 녹여내지 못한다면 프로그램과 인생,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패배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 'MBC 시사교양의 부흥'이 점점 멀어지는 듯 애석한 요즘, 나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하는 문제 못지않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