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들
<심야괴담회> 연출을 그만둔 뒤, 자의 반 타의 반의 허송세월 아닌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영화를 많이 봤으며,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 가운데 기쁨에 취해보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으며, 희망과 체념 사이에서 갈등했다. 내게 희망과 체념을 한 단어로 뭉뚱그려보라면 그것은 아마 '내년'이라는 말일 것이다.
내년, 내년이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가 없다. 계획을 세운다는 행위는 어느 정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SNS에서 이기주 기자가 김재철 전 사장에게 질문하는 과거 영상이 돌고 있다. 대통령은 유독 '악의적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MBC를 비토 했다. 현 정권과 지지자들은 MBC가 좌파세력의 어떤 거대한 음모를 배후에 두고 움직인다고, 저들 자신도 믿지 않는 흑색선전을 한다. 내가 볼 때, 이 기자와 비서관 사이의 설전은 대통령실이 보여준 그동안의 냉대에 대한 울분의 표시였을 것이다.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를 취재하기 위해 국회 로턴다홀에서 숙식하던 시절, 당시 유명한 여당 중진이자, 한때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국회의원의 말이 생각난다. "여, MBC랑 한겨레 기자는 나가라!"
내년, 내년이 온다면 참혹한 모습으로 올 것 같다. 요즘 MBC의 모습은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누가 나를 칼로 찌르려고 한다면, 조용히 칼을 맞기보다는, "여기 칼 든 사람 있어요! 아이고 나 죽네!"같은 비명, 혹은 단말마의 표현이라도 해보자는 것. MBC는 '언론'임을 자부하는 족벌 체제의 선전 기관과 그 하수인들, 혹은 철학과 원칙도 없이 이도 저도 옳소이다를 외치는 것을 중립으로 아는, 동류라고는 하지만 영원히 동류일 수 없는 부류들로부터 고립될 것이다. 그리고 '마봉춘'에서 '엠빙신'으로, 안으로부터 썩어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