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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Aug 31. 2020

내리막 길, 오르막 길

  달리기의 시작은 대체로 가벼운 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은 날도 종종 있습니다. 굳이 구분하면 85% 정도는 발끝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뿐하다고 느끼지만 15% 정도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툴툴 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이 어땠든 간에, 돌아올 땐 무거워요. 지쳤으니 당연히 그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무려 달리기를 시작한 지 4개월을 꽉 채운 8월의 마지막 날,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러닝을 시작할 때는 내리막 길이고, 돌아올 때는 오르막 길이었던 것입니다. 에너지도 빠졌는데, 오르막을 달리려니 두 배로 힘이 든 것 아니겠어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괜히 부아가 납니다.


  그냥 '해 치워 버려야겠다' 싶으면서, 이성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제 배운 대로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초점을 맞추며 달려 봅니다. 등, 골반, 허리, 무릎의 리듬에 집중해 봅니다. 어느새 생각은 '그냥 하지 뭐.'로 부드럽게 전환됩니다. 그렇다고 달리는 30분 내내 그 생각만 하긴 지루해요.


  어제 본 패션 잡지 '보그'가 9월호가 떠오릅니다.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의 화보가 마치 과꽃과 코스모스가 휘날리는 들판처럼 서정적이었습니다. 한국의 꽃들은 흰색이 한두 방울 정도 섞인 듯 부드럽습니다. 채도 100%가 아니라 98% 라고 느껴요. 화보 속 색들도 그렇습니다. 쑥잎의 뒷면 색을 닮은 치마폭은 소박하지만 단단한 할머니를 닮았습니다.


  100세 안팎의 할머니들이 한복을 입고 당신들의 공간에서 찍은 화보입니다. 지면으로 보이는 구석마다 감정이 느껴졌어요. 화보를 보며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그중에서도 102세의 이차순 할머니가 기억에 남습니다. 보행기를 끌고서 천천히 기어이 혼자 힘으로 노인정에 가시고, 돌아오셨을 땐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 하시며 혼자 힘으로 마루에 올라섰다고요.


  스스로 하겠다는 의지.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마침맞은편엔 파란 티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께서 달려오십니다. 티셔츠는 가슴팍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어요. 할아버지는 군살 없는 몸에 종아리는 물론이고 팔뚝과 등까지도 단단한 근육이 덮고 있습니다. 아, 저런 모습이고 싶다!라는 생각이 명치끝에서 돌돌 뭉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2.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 조금 더 달릴 수 있군요! '그냥 하지 뭐~' 하며 힘을 빼고 달립니다. 내리막 길 뿐 아니라, 오르막 길도 달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어제 보그엔 '놀면 뭐하니?'에서 린다가 불러 차트 상위권에 올라온 <다운타운 베이비>의 블루 인터뷰도 있었습니다. 그도 그냥 일기 쓰듯 곡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예술가라 칭하는 분들께 묻고 싶다며, 그 가수를 대표하는 곡 세곡만 불러보라면 생각 안 난다'고요. 아팠습니다.


  어떤 꽃인지도 모르는데, 언제 꽃 피울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서, 10년 20년 흐르다 보면 저도 언젠가 대표작이 생기지 않을까 다독여 봅니다. 저의 1호 독자, 아들이 매일 찾아 읽는 걸 보면, 가능성은 있나 보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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