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재 Dec 17. 2023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당신을 위한 변명

얼레리 꼴레리


'벌거벗은 임금님'은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쓴 동화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나라에서 읽히고 연극, 애니메이션, 그림책 등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어 왔다. 다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먼 나라에 무능하고 새 옷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황제가 있었다. 사기꾼 재단사 둘이 황제에게 접근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세계 최고의 옷을 만들어 주겠다며 꼬드긴다. 재단사들이 걸어놓은 "나쁜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는 프레임에 갇혀서 다들 옷이 보이는 척한다.

연령과 대상에 따라서 '마음씨가 나쁜 사람', '구제불능 멍청이' 등으로 막연하게 대상을 특정하기도 하고, '신분에 맞지 않거나 어리석거나 무능한 사람들'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신분에 맞지 않다'는 특히 귀족이나 관료들과 같이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진 분들에게 강력한 올가미가 될 것이고,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모든 사람에게 걸 수 있는 폭넓은 프레임이다.

모두가 보이는 척하는 사이에 새 옷을 만드는 일은 진행되었고, 실체가 없이 시늉만 했던 투명한 새 옷을 입은 황제는 거리 행차를 나간다. 모든 사람의 눈에 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으면 멍청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걸려서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입을 닫고는 아무도 먼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길 가에 서서 임금님의 행차를 지켜보고 있던 한 꼬마가 소리를 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 얼레리 꼴레리. 그때서야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웃는다. 이구동성으로 손가락질을 해댄다.


'벌거벗은 임금님' 또는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제목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원래 제목이 'Kejserens nye Klæder(황제의 새로운 옷, 1837)'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출판하면서 제목을 はだかの王様(벌거숭이 임금님)으로 달았고,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황제의 새로운 옷'(The Emperor's New Clothe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번역하여 'The Naked King'이라고 말한다면 동화의 내용을 설명하기 전까지 제목으로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새나라의 어린이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벌레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자연계 자기 계발의 성공 모델인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국가와 사회로부터 일찍 일어나기를 강요받았던 새나라의 어린이였던 나는 권장 필독서인 세계 명작 동화 시리즈의 그림책으로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읽었다. 글자를 익힌 다음에는 안데르센 동화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


군부 독재의 서슬이 퍼런 시절에 읽었던 동화는, 가요 테이프의 맨 마지막 트랙에 '건전 가요' 한 곡을 반드시 넣어야 했던 시대를 반영하듯 동화마저도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동화의 마지막 장마다 억지로 구겨 넣고 있었다. 그 시대의 분류에 따르면 가장 나쁜 인간은 '나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감'이라고 사기를 친 재단사들이었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 최우선 척결 대상이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이 허영심과 허례의식이었다. 국가에서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국민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까지도 통제를 하려고 했던 시대였다. 홀딱 벗고 거리로 나서게 된 허영심이 불러온 낯 뜨거운 낭패는 직관적이고 사실적인 사례로 국민들에게 들려줄 훌륭한 국민교육헌장이었다. 허영심은 곧 패가망신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전하는 시대의 교훈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서 국가에서 국민을 선별하여 마음대로 때려잡는 것은 당연하고,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으로 근검절약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참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새나라의 어린이였던 내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고 가슴속에 새겼던 교훈이다. 우리보다 더 잘 산다는 세상의 다른 나라에서, 그냥 듣보잡 동화가 아니고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작 동화라니, 장차 자랑스러운 선진 국가의 일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새나라의 어린이들도 동화의 교훈에 따라 당연히 그렇게 살겠노라 다짐을 했다.


잃어버린 1인치를 찾아서


'잃어버린 1인치를 찾아서'는 틀에 박힌 TV의 규격을 파괴하는 시발점이 된 오래전 삼성전자의 광고다. 갑자기 '벌거벗은 임금님'에 숨어있는 1인치를 발골해 내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만든 세계 최고의 옷을 입고 있다'라며 투명한 거짓의 옷을 입고 설치는 수많은 재단사와 임금님들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 없는 눈으로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홀딱 벗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지만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 꼴이 그런 거야!"라는 한 마디에 나의 삶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다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 이 이야기에서 어느 장면의 어디쯤에 끼어 있는 인물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황제


현실에서 황제와 거리가 멀어서 나와는 가장 무관해 보이지만 성격의 유형과 삶의 태도로 비교해 볼 수는 있을 듯하다.


무능과 쇼핑 중독


안데르센이 동화 속에서 그려낸 황제는 무능하다. 동화 속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왕국 운영에 상당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정을 그렇게 내 팽개치고 엉뚱한 짓에 몰입하면 나라가 잘 돌아갈 리가 없다. 동화 속 황제는 자신의 옷차림, 즉 외형이나 체면에 신경을 많이 쓰는 스타일이다. 오늘날에도 '쇼핑 중독'으로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을 쌓아둔 채 계속 새 옷을 구입하는 분들도 여전히 있으니 세상에 유일하거나 안데르센의 시대에만 있었던 독특한 과거의 인간 유형은 아니다. 현대 심리학에 따르면, 옷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부족하다'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프레임과 공포 정치


강박적 집착의 결과이거나 결핍에 대한 욕구 충족인지 모르지만, 황제는 새로운 옷에 대한 관심 밖에 없고 황제의 책무를 다하기보다는 개인의 시간과 왕국의 자원을 모두 새 옷을 쇼핑하는데 소비한다. 왕국의 재정을 마음대로 펑펑 쓰며 사치스럽다. 사기꾼 재단사의 프레임에 속고도 끝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보아 자존심이 세고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험담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극대노하고 신하의 목을 날린다. 그래서,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는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다'라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들 복지부동하며 전전긍긍한다. 한 마디로 공포 정치에 대응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바짝 엎드려서 비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국가나 회사나 단체는 변화와 발전은 없다. 국가나 회사의 시스템이 잘 짜여 있다면 몰락이나 퇴행을 하지 않고 그나마 현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계속 성장하고 진보하고 있는 다른 국가, 회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최악의 리더: 무능하고 고집 센 나르시시스트


황제는 재단사들이 쳐 놓은 프레임에 걸려서 혹시나 자신이 "어리석어 보이거나 황제라는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있지도 않은 옷(사실)을 있는 척 가장한다. 최악은 발가벗은 자신을 뻔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홀딱 벗고서라도 끝까지 거대한 군중들 앞에서 성대한 퍼레이드를 벌이고 마는 고집불통에 막무가내 독선적인 성품이다. 현실에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황제 스타일이다. 공포와 폭압에 억눌려 '안 보이는 것도 보이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못하고 살아가는 국민들이 불쌍할 뿐이다. 그냥 동화 속 한 인물로 웃어넘길 수 없이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은, 오늘날에도 이런 지도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단사


우리 주변을 맴도는 뿔 달린 하이에나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유형의 인물이다. 피싱과 같은 물적인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고, 요즘 시대에는 무형의 생각과 가치관을 팔 수도 있다. 우리 삶의 커튼을 뚫고 다가오는 흐릿한 최초의 부분은 유니콘의 뿔처럼 희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절실한 상황을 설정하고 해결책을 도와준다고 제안한다. 절실한 상황에서 절박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없이 은행으로 달려가고, 꿈에 부풀어 특강이나 북콘서트에 몰려가게 된다. 다만 쉬운 먹잇감을 발견하고 웃고 있는 살찐 하이에나를 볼 수 없을 뿐이다.


거짓을 통해서 이익을 취하는 전형적인 사기꾼


쉽게 거짓말을 하고, 거짓을 통해서 이익을 취하는 전형적인 사기꾼이다. 특히 사람들의 절실함과 절박함을 잘 파악하고,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을 옭아맬 수 있는 프레임을 잘 짜는 재주가 있다.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꿰어낸다. 대중들의 심리와 대중 매체를 이해하고 잘 활용한다. 위험한 것은, 거짓을 생성하는 재주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의심하면서도 군중 앞으로 걸어 나가게 만들 정도의 가스라이팅과 대상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무서운 것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대중들에게도 집단 최면을 걸어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들 수 있는 이미지 메이킹의 기법이 있다는 것이다. 매력적으로 만들고, 홀리고, 열광하게 하고, 트렌드를 만든다. 놀라운 것은, 돈을 바치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고마워요", "존경해요", "사랑해요"라고 고백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끝에는 이익이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거짓과 감언이설의 끝에는 반드시 이익이 있다. 인기나 명성이나 돈이나 얻게 되는 이익의 다양한 형태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중을 움직여 이익을 얻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물론, 다양한 명분과 이미지로 포장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세계 제일의 옷을 만들 줄 안다"라고 주장하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사적 이익을 취하려는 인간 유형이다. 


신하들


전형적인 관료


'전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관료라고 분류될 수 있는 분들이 불쾌할 것이다. 일부의 사례로 일반화시키고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 띄운다고 항의를 할 것이다. 분노하고 항의를 하시는 분이 있다면 다행이다. 최소한 그분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여길 것이니.


안데르센이 그려놓은 신하들은 전형적인 관료들의 유형이다. 이야기 속에서, 재단사들을 의심한 황제가 신하를 보내서 옷의 완성도를 점검하도록 했다. 황제가 자신의 판단에 도움을 구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장을 방문한 신하의 눈에도 분명히 옷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는 혹시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가 멍청이로 보이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옷이 잘 만들어지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나라 꼴이 엉망이었을 것 같다.  


평가에 목을 맨다


관료 사회는 재단사들이 걸어놓은 프레임대로 '해당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무능하다'는 평가를 죽기만큼 싫어한다. 근무 성적 평정이 승진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료 사회에서 체면과 권위는 긍지와 자존심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체면과 권위를 위해서는 못 할 일이 없다. 현장에서 살펴본 옷감이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보인다고 하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여 철회하고 윗선이나 민원의 요구에 편승할 가능성이 높다. 김수영 시인의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라는 표현처럼 권력이나 힘에 굴복하고 부화뇌동하는 성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 나쁜 관료는 표 나지 않게 자신의 이익에 집중하고,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서 조심하고, 눈치와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보이고 보이지 않고', 또는 '들리고 들리지 않고'와 같은 형식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이에 편승하여 기생한다. 이런 무리들이 득세를 하면 결국 여론은 조작되고 진실은 감추어진다.


신하들에게


시대가 혼란스럽고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철저한 사명감'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을 갖추는 것이 한 국가의 신하(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거리의 사람들


군중심리


사람들은 임금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옷을 입고 행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 갔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임금님의 행차를 바라보았으나 임금님은 새 옷을 입기는커녕 발가벗고 있었다. 군중들의 눈에도 임금님의 옷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인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는지라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닫고 임금님의 옷을 칭송하였다. 그런데 순진한 한 꼬마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눈에 보이는 사실 그대로 말하면서, 그때서야 군중들은 너도나도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꼬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말한 아이는 '슬기로운' 사회생활의 필수덕목인 소위 '분위기 파악'을 하고 주변의 분위기에 맞추어 적당히 입을 닫고 사는 정도의 사회화 과정 이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글(아래)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순수한 인식의 수준에서 바라보는 진실이다. 이익의 유불리를 따질 수 없는 순진함이 있기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정직해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https://brunch.co.kr/@algarve/67


인생 소망


세상에 깎여서 닳고 휘둘리다 보면 칡넝쿨처럼 이리저리 엉켜 산들 어떠하리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용인하게 되고, 급기야는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라도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모진 세상 풍파를 거치고서라도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다"라고 담담하게 외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당신은 어느 단계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

山只是山, 水只是水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원 참사를 다룬 크러쉬(CRUSH)를 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