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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Nov 19. 2020

남자가 찾던 장소

'붉은 꽃 속에서'를 읽고

해가 아직 뜨지 않은 11월의 새벽, 남색 패딩을 입은 남자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새어 나온다. 목 끝까지 옷을 여미어도 새벽의 추위는 쉬이 막아지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떤다. 

남자는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쓴다. 남자의 숨결에서 나오는 온기가 마스크로 인해 빠져나가지 못하자 얼어붙었던 남자의 입이 빠르게 녹아들고, 안경에는 허옇게 습기가 차 시야가 빠르게 흐려진다.

차 몇 대가 찬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고, 새벽 내 도로에 내려앉은 낙엽이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 다시 천천히 내려앉는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천천히 회색 계단을 계속해서 오른다.

남자는 점차 몸이 뜨거워짐을 느끼고, 고르게 내뱉던 숨이 조금씩 차오른다. 계단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군데군데 모서리가 깨져있어 점차 오르기 힘들어진다. 남자의 시선은 점차 내려가고 눈앞의 계단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계단이 옅어지더니 산길이 이어진다.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는다.

어느새 남자의 주변은 나무로 가득하다. 해가 아직 완전히 들지 않아 모든 것이 짙푸르게만 보일 뿐이다. 남자는 길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이쪽이든 저쪽이든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앞으로 걷는다. 바닥에 수북이 깔린 낙엽과 불규칙하게 발에 차이는 돌과 나무뿌리를 밟으며.

나무 등치를 붙잡으며 계속해서 산을 오르던 남자의 앞에 작은 오솔길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가로지르는 그 길 위에 선다. 폐를 채우는 차가운 공기를 몇 번이나 크게 들이마신 남자는 산을 오르는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길은 희미하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진다. 좁았던 길이 조금씩 넓어지자 남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본다. 남자의 눈앞에 자그마한 절이 나타난다. 짙푸른 녹음으로 둘러싸인 그 절이 마치 진한 물감으로 칠한 한 폭의 유화를 보는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걸음을 완전히 멈추자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와 일정한 간격으로 쓰으윽 쓰으윽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그제야 절의 왼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푸른 새벽의 마지막 비구니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흙먼지도 일으키지 않은 채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다정하게, 조금씩 조금씩 쓸어내고 있었다. 무성한 나무와 소박한 절을 배경으로. 마당에는 나뭇잎과 가지들의 틈새를 뚫고 나온 옅은 빛이 아지라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구니가 비질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허리를 피고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남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무도, 절도, 비구니도, 물도, 빛도, 남자 자신까지도 모든 것이. 그곳은 남자가 찾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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