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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Nov 22. 2020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낱장 일기16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최근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서’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주인공 안줌은 양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지만, 집안의 기대에 따라 남자로 자란다. 허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그이기를 거부하고 그녀로서, ‘히즈라’의 삶을 살게 된다. 개방되고 진보적인 사회에서도 이러한 성적 정체성 문제는 다소간 조심스러운 양상을 띠기 마련인데, 하물며 인도는 어떨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작품 속에선 ‘히즈라’의 녹록지 않은 삶이 숱하게 묘사된다. 그녀들은 집단을 이루고 하나의 종교적 역할로 나름의 공동체적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나 그들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것은 결코 아니었고, 심심치 않게, 아니 평생에 걸쳐 흔하게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며 산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듣고 나서도 참 신기했는데, 2014년 인도 대법원이 ‘히즈라’를 제3의 성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카스트가 여전히 존재하고, 많은 인구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그 인도가!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묘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도에서 ‘히즈라’는 종교적 역할을 일부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인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안줌이 이슬람교도들이 죽어가는 학살의 참극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히즈라’였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히즈라’를 죽이면 운이 없다는 그 미신 때문에 안줌은 폭도들로부터 살아남았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체 위에서 자신이 불운한 존재라는 이유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죽음만큼 수치스러웠으리라. 살아남았다는 본능적 기쁨도 잠시 ‘히즈라’로서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뿌리 깊은 경멸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단순히 흘기는 시선을 받는다는 것? 일상 속 모진 혐오를 묵묵히 견뎌내는 것? 불편하지만, 그 모든 걸 내 나름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면 되는 것?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들이 감내하는 슬픔의 테두리 안쪽에 닿지는 못하리라. 평범한 대다수에게는 그러한 삶을,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항시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진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히즈라’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그들을 환영하지 못하고 있는가. 당신은 왜. 나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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