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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Feb 13. 2024

해외에서 카드 분실 후 쓰는 글

지금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

지금은 잠시 스페인 말라가를 떠나 영국 런던에 와 있습니다. 드물게 파란 하늘과 밝은 햇빛이 비치는 날이라 신나게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제게는 추억 넘치는 난도스(Nando's)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거든요. 난도스는 영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페리페리 스타일 치킨 전문 레스토랑입니다. 그렇게 차려입고 나갔는데, 있어야 할 곳에 제 신용카드가 없는 거예요. 소파나 바닥에 떨어뜨렸겠지 하면서 애플 페이가 있으니 그대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뭔가 기분이 영 찜찜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향했죠. 하지만 카드는 어디에도 없었고, 카드 앱을 열어서 보니 제가 쓰지 않은 카드 사용 내역이 주르륵 뜨는 겁니다. 그때부터 정신이 없어졌습니다.

어떡하지? 카드를 정지시키면
애플 페이도 못 쓰는데?
파운드 현금도 없는데?
다른 카드는 스페인에 있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찾은 도난 신고 번호로 전화를 걸려 했지만, 유럽지역에서만 사용하려고 한 제 핸드폰은 +82로 전화 거는 것을 거부했고, 불행 중 다행인 건 카드 앱에서 도난 분실 신고를 바로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애플 페이도 정지되었고, 우버도 다른 결제 서비스도 모두 정지되었죠. 망연자실, 국제 미아가 된 기분으로 정말 울고 싶었어요. 부주의했던 나도, 즐겁게 그 카드를 쓰고 다녔을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사람도 미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런던에서 마지막 날, 이렇게 보냈다간 후회가 막심할 것이란 걸 알기에 미소를 지으며 문제는 일단 해결됐으니 밖으로 나가자고 호기롭게 외쳤죠!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유로 현금을 긁어모아 파운드로 환전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난도스로 향했죠. 그런데 메뉴를 보면서 자꾸 제가 가격을 보는 거예요. 마지막 날이라 친구에게 대접을 하고 싶었거든요. 저녁을 먹고 남은 현금으로 공항으로 가야 하다 보니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테이블에 있는 QR코드를 찍더니 메뉴를 정하고 주문 및 결제를 하는 거예요. 뭔가 울컥하는 마음에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내가 사고 싶었는데 미안한 마음과 안도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어요. 결국 다 먹고 나서야 한 마디 했습니다.

내가 오늘은 사려고 했는데...


그러자 그 친구가 받아친 한 마디로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녁 안 사려고)
그렇게 까진 안 해도 됐는데!
(You didn't have to go that far!)


즉, 너 저녁 안 사려고 카드 일부러 잃어버렸지?라는 식의 어이없는 말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웃고 나니 마음이 정리가 되었어요. 그 친구도 얼마 전에 아들 생일 선물로 게임기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요. 상황 파악이 되고 나서 그 사람이 미웠다거나, 왜 내게 이런 일이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고 해요. 사기 친 사람이 불쌍했다고 합니다. 운 좋게도 자신은 그 돈이 없어도 밥을 굶거나, 큰일이 나진 않지만, 그 사람은 또 어디선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저도 슈퍼마켓과 와인샵, KFC에서 제 카드를 긁고 다닌 사람을 떠올려봤습니다. 아마 어제저녁에 생긴 공돈으로 파티를 잘하셨겠지요. 하지만 그뿐이겠죠. 그렇게 남의 카드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지금 당장은 즐겁고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그런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긴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그(또는 그녀)를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어요. 어느 적정한 때가 오면 자신을 변화시켜 스스로 만족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로 했습니다. 많이 놀랐지만 그때 그 감정은 그대로 흘려보내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되니까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You didn't have to go that far!" 하는 말에 실컷 웃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감정을 억누르고, 무조건 좋게 생각하려고 애쓰기보다 별것 아닌 듯 웃어넘기는 게 더 쉬웠다고 할까요.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함께였기 때문에 훨씬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감사함을 전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 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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