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1999)
<고요함의 지혜> 책을 읽은 후 에크하르트 톨레의 두 번째 책,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읽고 글을 쓰는 첫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글을 쓰기가 싫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 우주에 존재하기 싫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다 읽고 난 나 자신이 크게 성장한 줄 모르겠거든요. 크게 성장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무엇이 변화했을까요? 아니 변화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책을 읽고 요약 정리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막상 읽고 글쓰기를 계속했지만, 하나의 완성된 깨달음을 정리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뭐 했나 싶고, 계속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괴감이 듭니다. 나아가서 더 중요하고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바쁜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깁니다.
그래도 꾹 참고 책을 펼쳤습니다. 하기 싫다고, 내가 싫다고 책을 읽지도 않고, 글을 쓰지도 않는 나는 더 싫을 것 같았어요. 어떻게든 읽고,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가?
우주의 신성한 의도와 목적을 펼치기 위함이다.
당신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에크하르트 톨레
에크하르트 톨레가 묻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답을 주네요. "우주의 신성한 의도와 목적을 펼치기 위함"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하는 행동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해석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내가 지금의 나를 싫어하건, 한심하게 여기건,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건 아니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내가 의도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러니 내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나는 그 의도한 목적을 실현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요.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닙니다. 우주가 정한 것이니까 믿어도 됩니다.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조급해하지 말자 싶기도 하고요. 조금 더 읽다 보니, 에크하르트도 저와 비슷한, 어찌 보면 저보다 더한 경험이 있었던 듯합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고, 삶 자체가 끔찍스럽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했던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이런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은 깊은 갈망이 먹장구름처럼 나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에크하르트 톨레 / 독자 여러분께 | 깨달음은 우리 안에 있다
그의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달았을 때, 불현듯 깨달음이 이어집니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이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 때 불현듯,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하나가 아닌 둘이란 말인가?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다고 느낀다면, 나는 둘이어야 마땅하다. 평소의 내가 있어야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내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인 것일까?’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에크하르트 톨레 / 독자 여러분께 | 깨달음은 우리 안에 있다
'나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나', 즉 '에고'를 발견한 것이죠.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이 고민과 고통이 깊어지자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할까요? 그에 비하면 저는 고민의 깊이가 얕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저의 에고를 때려잡습니다, "그만해!"하면서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