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무 May 14. 2020

대기업 ‘못’ 때려치고

어쩐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당신에게


엊그제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페이스북은 7년 전의 내가 ‘입사 3주년’을 축하하며 지인들과 삼각지 어느 한우 맛집에서 고기 파티를 했었다는 과거를 푸시로 알려주기도 했다. 그때는 시장에 나를 내놓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3년을 버티는 것이 1차 목표였는데 어느덧 10년이나 견뎌냈다니. 정말이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10년 동안 재계 4위 그룹에서 마케팅을 담당한 나는 최근에 재계 2위 그룹의 카드 회사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여하간 10년 넘게 대기업에만 몸을 담아온 셈이다. 이직은 커리어 개발은 물론이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한데, 최근 회사를 옮긴 나는 ‘회사는(정확히는 대기업은)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실망과 함께 나에 대한 체념도 얻었다(?). ‘내가 대기업형 인재는 아니구나.’. 무려 10년 만의 깨달음이다.


일을 하는 것만은 늘 좋았다. ‘Self-motivated’ 혹은 ‘Goal-oriented’는 일할 때의 나를 잘 설명하는 단어다.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만 보자면 나는 이에 부합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슈는 역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조직문화였다. 돌아보니 ‘내가 이 조직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던, 아직도 생생한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오래 전의 일인데도 비교적 또렷한 것은 그 당시 그것이 문제라고 느꼈음에도 그냥 지나간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Scene #1

공작 상가였던가. 퇴근 후의 어느 소규모 술자리에서 계열사 차장인지 부장인지가 말했다.

“나는 여자가 따르는 술 아니면 안 먹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건너편에 앉아있던 나는 냉큼 그의 옆으로 가서 웃으며 술을 따랐던 것 같다.

그날 밤은 자괴감에 집에 가는 길에 조금 울었던 기억이 있다.


Scene #2

결혼 후 회사에서 답례품을 돌리며 인사를 다닐 때였다. 역시나 어느 아저씨 상사가 말했다.

“남편 아침밥은 꼬박꼬박 해주고?”

그래도 조금 머리가 굵어진 나는 “맞벌인데 왜 제가 해야 하죠?”라고 응수했던 것 같다.

여자 후배는 결혼하는 순간 KPI에 현모양처 지수라도 들어가는 것인가.

남자들은 어쩌면 평생 느끼지 못할 모멸감이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Scene #3

마찬가지로 결혼 후 회사에서 답례품을 돌릴 때의 일이다. 또 어느 아저씨가 말했다.

“집은 어느 동네에 있지? 자가인가 전세인가? 신축인가 구축인가?”

호구조사가 따로 없었지만 상대가 직급이 워낙 높은 사람이었어서 순순히 대답했던 것 같다.

당시 전세에 살았던 나에게 그는 회사는 집을 사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는 비유를 해줬다.

결혼과 동시에 현모양처에 이어 집주인까지, KPI가 또 추가되었다는

부담감 아니 답답함이 몰려왔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주 조금 달랐다. 입시-입사-결혼-내 집 마련-출산과 육아 등 소위 한국인의 연령대별 과업에 늘 의문을 품었달까. 사람마다 마음의 생김새가 다른데 왜 꼭 같은 길을 가라고 주문할까, 늘 답답했다. 또 남자의 역할-여자의 역할 같은 고정된 성역할에도 역시 항상 의문을 품었다. 성별은 신체를 규정하는 지표일 뿐인데 왜 행동까지 규정할까, 늘 답답했다. 성급한 일반화가 아닐까 싶지만 대기업은 말하자면 스탠더드 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인 것 같다.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인생 과업과 성역할에 의문을 품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사람들이 견뎌낼 수 있는 그런 곳. 이미 착실히 입시와 입사의 단계를 거쳤고, 결혼과 내 집 마련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당연하게 헤쳐나갈 사람들이 버텨낼 수 있는 그런 곳.


그래서 그들과 조금 다른 나는, 10년간 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회색분자 혹은 엑스맨 같은 사람. 그렇다고 조직을, 제도권을 떠나기에는 다소 용기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역량도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온실 안에서 견뎌냈고 버텨냈다. 대기업에서도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기적처럼 찾아낼 수 있었고, 그런 좋은 인연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답답했고 외롭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이 꽤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고, 그래서 브런치를 찾게 되었다. 우리 서로를 발견하면 유치할지 몰라도 이렇게 얘기해주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당신 같은 사람, 또 있다고. “You are not alone.”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팀장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