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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un 05. 2023

고고학

Today was Today


고고학: Today was Today



전시 《고고학: Today was Today》를 통해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망각되고, 손쉽게 재건되는 세계에서 영원히 오지 않는 미래, 언제나 과거로 남겨지는 현재를 의식하며 '오늘은 오늘이었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곱씹게 된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화된 지식 사회에서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지식의 누수와 의식의 공백을 예민하게 살피는 4인의 창작자(김슬기, 김현석, 정재연, 희박)가 주축이 된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각자 다른 입각점에서 ‘현재화된 과거’와 ‘고고학적 현재’를 소환해 낸다. 이에, 작가적 연구와 실천의 현장을 '고고학'이라는 먼  개념과 'Today'가 발산하는 현재성을 교차시킴으로써, 오늘날 시각예술가들이 쟁점화하는 역사적 문제의 범주와 시각적 서술의 양상, 세대 간극의 미묘한 분절점을  살피고자 한다.


한편, 작가들과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건져올린 ‘고고학’이라는 말은 사소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집단의 일조차도 누구든 자기 식대로, 제법 구체화하여 인출한다는 것[1], 많은 이들이 공식적이라고 믿는 사료나 의심없이 공유되는 많은 것들이 한 조각의 사실일 뿐 총체적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핍진성을 증대시키는 기록 매체의 발전과 과학적 생성기술은 오히려 혼란함을 가중시킨다. 그래서일까? 어제와 오늘 하루 사이에 놓인 망각의 속도와 무지의 폭이 매 순간 증폭되고 있다는 일말의 초조함은 지나간 모든 것을 새롭게 의심하고 들춰보고자 하는 탐사의 욕망으로 전이되고, 일상의 모든 것을 저장하고 박제하고자 하는 습속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하루만치의 삶을 감당하는 데 온 힘을 쏟는 평범한 이들에게 지나가 버린 시간의 의미와 과거의 유산이란 어떤 의미인가. 일상 이미지의 역사를 조형(造形)의 영역으로 옮겨와 조작적으로 재구성하는 예술가들에게 과거의 시간이란 매번 샘솟는 이야기를 건져올릴 화수분이라도 되는 것일까? 감쪽같이 흔적을 지우고 새로 고쳐 쓸 수 있는 만능 양피지,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아닐까? 둔탁했던 질문이 조금씩 연마되고 방향을 잡아가는 동안, 네 작가는 각자의 작업 속에서 불투명한 자취를 좇으며,  낯설게 바라보기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한 중앙을 지나지는 세 곳의 흩어진 장소를  이어긋기 하며 [2], 우리가 살고 있는 화려한 도시의 그늘진 구석과 어디선가 뭉개지고 휘발된 시간의 층위와 공백을 상상해 보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 짙어진 녹음 사이로 선명하게 돋아난 오늘의 풍경. 어쩐지 고고학적인 모호함과 희부연 수수께끼에 잠긴 것 같다. 엊그제 종로구의 한 신축 공사장에서 발굴되었다던 고려시대 행궁터[3]나 1500년만에 출토된 신라시대의 바둑돌[4]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그곳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골똘히 생각한 후, 몇 가지 단서를 찾은 다음에야 그 윤곽을 더듬을 수 있을까. 도시의 뼈대와 표피는 새로운 것들로 늘 대체되고 있고, 미시적 변화에 신경쓰기에는 우리의 삶도 못지않게 분주하다. 시간을 한껏 늘여서 생각하고, 눈 앞의 것들을 단계적으로 미분하여 들여다보고, 가끔은 없어진 것들을 추념하거나 생생하게 빚어내는 이들은 소수의 사람이다. 도시 연구자나 미술 작가, 매일 같은 코스를 걷고 기록하는 강박증적 산책자 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마음가짐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그날 오후 다함께 엉터리 고고학과 가짜 지질학, 그리고 아마추어 인류학을 논하게 된 연유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 도시사회학이나 고고학의 학문적 개념과 방법론을 수용하는 것에 관심을 두거나,  유사한 것을 모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자처하여 시간 여행자 되기를 즐기는 오늘날의 작가에게 (네 작가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샅샅이 해리되어 있는 세계의 불친절이야 말로 ‘오늘’과 가장 가까운 때를 고고학적 탐구의 시작점으로 설정하게 만든 핵심 기제일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고고학은 유적이나 유물과 같은 잔존 물질 자료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편 ‘오늘’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는 과거 역사를 작업적으로 재구성하는 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치적 태도이자 작업을 촉발하는 태세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창작의 토양과 작업의 결과물이 결코 유사하다 할 수 없는 네 명의 작가가 맺고 있는 느슨한 관계성과 세대 기억의 미묘한 격차는 특정한 개인이 설정한 과거와의 거리 감각을 상호 가늠하기에 꽤 적합한 구도다. [5] 70년대생부터 90년대생까지 사회의 표준분포도 안에 들어오는 네 작가는 학습된 역사에 대한 순응과 저항, 역사적 무관심 사이에서 표류하는 세대에 속한다. 소수의 표본을 집단의 표상으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얼마만큼은 종속되어 있는 각자의 사회문화적 통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작업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는 일은 실로 흥미롭다. 감각과 취향, 매체 양식의 문제로 환원되기 쉬운 오늘날 시각예술의 흐름 속에서 네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면 리서치 과정과 시각적 발화의 방식에는 격차가 있지만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조건 지어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기억과 물질의 문제, 재현과 복원의 정치적 테제에 집중해 온 교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루고자 한 개별적 문제들은 다양한 각도로 펼쳐져 있다. 이를테면, 작품을 통해 강제된 기억의 통합과 분열의 풍경, 집단의 재현을 개인의 감각으로 전환하여 특수하게 세공하는 일, 역사주의적 미술의 양식을 교묘하게 차용하는 동시에 탈피하고자 하는 모순적 양상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작가 개인의 문화기억을 구성하는 관계항의 역동성을 파고드는 일은 그 속에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기도 하고, 참여작가 김현석의 어휘를 빌자면 열화(deterioration)된 것들을 상상력으로 보간(interpolation)하고, 현존하는 물질(substance)을 소급하여 환영(illusion)에 도달하는 일이기도 하다. 


네 작가의 자리에 서서 신기루처럼 사라질 지 모를 오늘 하루의 부박함과 끝끝내 되돌아오는 과거의 질긴 탄성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자발적 망각과 적극적 오인이 상식과지성을 압도하는 어떤 세계에서 고고학은 완벽하게 예견된 실패의 영역일 것이다. 다만, 부주의하게 누락된 것들을 되살펴보고, 어긋난 것들의 층위를 이리저리 맞춰보고, 어둠에 잠긴 것들을 밝음 속에서 꺼내 보고자 하는 부지런함에 대한 친절한 호명이기를 바란다. 작업에 대한 네 작가의 고민과 상상의 무게를 중계하고 있는 오늘의 전시 또한 한점의 유물이 되어, 누군가의 하루에 잠시 정박되기를 상상해 본다.  


글 조주리





[1] 어느 오후,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1995년 당시의 건물 해체 사건을 기억/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출생 지역과 연령, 식민 잔재에 대한 심리적 저항과 제국주의 건축에 대한 미적 판단, 매체 경험의 상이함 (단행본, 매스미디어, 위키피디아, 유투브 등) 으로 인하여 과거 사건에 대한 인지적 재구성과 정서적 온도가 가파르게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점에서, 동시대인들에게 ‘고고학’의 범주는 선사시대만의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나눈 바 있다.   

 

[2] 4인전으로는 드물게 전시는 세 공간을 연결하는 형식을 취한다. 세 장소는 서울의 역사문화적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종로구와 용산구의 옛 터에 위치하고 있으나 다양한 전시 형태와 관객 개발, 정체성 확립을 모색 중인 신생공간에 해당한다. 섬처럼 떨어져 있는 세 곳의 전시 장소(스페이스 중학, 아트하우스 연청, 갤러리 더씨)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일의 어려움을 절감하는 바다. 그러나, 세 곳의 장소 위에 네 작가의 기존작과 새로운 작업을 새로운 구도로 충돌시키고, 지속적으로 서로의 작업에 침투하는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한 곳에서 다음 곳으로 옮겨가야 할 자잘한 당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3] 「서울 종로 신축 공사장서 고려행궁 추정 유적지 발견」, 『동아일보』, 2023.3.22


[4] 「1500년 만에 부활한 신라 바둑 대국…고분 출토 자갈돌로 실제 바둑 둔다」, 『중앙일보』, 2022.4.25


[5] 네 작가는 비슷한 시기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것을 계기로, 2022년 여름부터 최근까지 발전시켜온 지적 교유 속에서 공동의 주제 탐색을 진척해왔고, 기획자는 이후 모임의 비평적 조력자로 합류하게 된 수순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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