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서 장면으로
- 서완호의 대략적 각색과 치밀한 적용
글 조주리
서완호가 그려온 세계의 풍경 속엔 서늘함이 감돈다. 그 속에는 살아있는 것들의 활기찬 목소리도, 움직임의 자취도 담겨있지 않다. 모두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 같다. 오래 전 영화 촬영이 끝나고 무신경하게 방치된 외곽의 세트장, 긴 방학이 끝나갈 무렵 찾아간 학교 운동장의 안쪽 구석, 하나 둘, 결국엔 마을 사람 전부가 이주해버린 재개발 직전의 동네 어귀처럼 말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보태자면, 몇 가지 작업은 어느 날 아침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증발해 버린 재난 영화의 도입부 혹은 모든 사건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결말부 같다. 급박한 상실의 흔적도, 퀴퀴하게 부패하는 낌새도, 아우성치는 소리도 없다.
의연하게 남아있는 것들이란 흔하디 흔한 것들이다. 도시의 웃자란 나무, 한 차례도 타격 받은 적 없는 듯 앙다문 콘크리트 건물의 골조, 특징 없는 회색 거리의 지형지물일 테다. 생명의 끈질김이 모조리 소거된 세계의 고요함이, 원치 않는 도시의 침착함이 이런 것일까. 그 어떤 구체적 정황도, 과잉된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려는 듯, 화면은 임시 멈춤 버튼이 눌려진 상태로 물리적 진공 상태를, 정서적 공허를 내내 유지하고 있다. 절기도, 바람의 기운도, 누군가의 기분도 도통 모르겠는 회색조의 어느 날, 어느 순간처럼.
누구보다 기운생동 넘치는 필치로 자연의 장대함과 도시의 서정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작가 서완호가 포착한 순간과 그가 붙들고 있는 풍경의 요체는 무엇일까. 주변보다 도드라지기 위해 모든 존재가 상호 쟁명하는 세계에서 그림이란 결국 작가의 입장과 자리를 규정하는 절실한 시도일 것이다. 작가 서완호 또한 삼십대를 관통하면서 성실함을 무기로, 꾸준한 밀도로 다수의 작업을 제작해왔다. 작업 초기 가능한 여러 시도들을 해보았고, 더러 돌발지점처럼 보이는 작업들도 작업 이력에 남아있지만, 대다수의 작품은 도시 내외부의 풍경을 좇아온 과정 속에서 남긴 결과물이다.
“숨은 장소”, “조용한 땅”, “모호 구역”과 같은 말들은 전시의 표제이자, 여러 작업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공동의 수사에 해당하다. 또한 자기 자신의 예술적 표명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인식에 그리 중요하게 남아 있지 않는 경계적 공간 혹은 여분의 장소에 대한 관심과 미미한 존재에 대한 관찰은 작업을 추동하는 힘이자, 중심 소재이자, 일관된 주제의식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전시 이후 공식적으로 남게 된 공통된 개념과 평론의 언어로 정돈된 해제들을 걷어내고 나면, 작업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평범함은 평범함으로 인해 오히려 난해함을 가중시키고, 일관되어 보이는 것들도 보기에 따라 변덕스러워 보인다. 작가의 레이더에 붙잡힌 세속적 정경과 회화로 각색된 이미지 사이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때로 작가 자신도 표명하기 힘든 일종의 회색 지대가 있는 것처럼 짐작된다. 현실 풍경과 회화적 구성 사이에서 작가가 취하는 거리감의 조절과 위상차를 추적하는 마음으로, 작가의 시간을 되감기 해본다.
가장 먼저 실격된 것은 사람이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거나, 있으나마나 한 존재감으로 밀려나 있는 그의 작업에서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사람을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이다. 장면의 요소가 되기에는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나무의 미묘한 흔들림, 잿빛 건물의 골조와 외장재의 컬러, 단서 없는 외곽 어딘가의 정경을 고요하게 들여다 볼 수 밖에 없다. 서완호는 애초에 무엇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더 정확히는, 무엇을 그리기 위해 무엇을 그리지 않은 것일까. 반대로, 무엇을 그리지 않으려고 무엇을 그린 것일까. 순환적인 질문이 솟아난다. 경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때로 너무나 ‘잘’ 그려진 화면이 던지는 연쇄적 궁금증이다. ‘잘’의 의미가 꼭 회화적 구도나 기법의 완성도, 혹은 매체적 탐구의 치밀함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 되지 않는 멀멀한 색감의 병치와 간명한 화면 구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소설적/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작품이 갖는 모호함과 서사적 폐쇄성이 ‘잘’ 설계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관객에게는, 우연히 포착된 평범한 화면이 사실은 ‘잘’ 설계된 비범한 장면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례로, 2022년작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이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가 그렇다. 어떠한 기념비적 사건도, 특수한 상황을 재현하지도 않는 세 폭 구성의 대형 회화는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자극한다. 서사를 극도로 배제한 화면은 역설적으로 극대치의 영화적 상상력을 투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의미심장한 제목까지 연합되면서 미약한 상상력은 더욱 타오른다. 텅 빈 건물 내부에 놓인 사무용 책상과 의자 세트는 촬영 직전, 배우들이 대본 리허설을 하는 공간일까. 최후의 인터뷰를 앞둔 구직자들이 담시 머무르는 공포의 대기실일까. 그도 아니라면, 외계인과 지구인이 접선하게 될 SF 영화의 핵심적 로케이션일까. 사심없이 펼쳐진 휑댕그레한 실내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범주가, 허접한 시나리오의 수준이 이 정도다.
서완호, 그런다고 달라지는건 없겠지만, Oil on Canvas, 193.9 x 390.9cm, 2022
그러나, 작가가 그 장면을 그려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관람객이 장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신선한 설정이나 정밀한 각색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을 지 모른다. 장면이 화면이 되고, 다시 그 화면이 특별한 장면이 되는 동안 정말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하나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두서없이 찍은 필름 몇 컷으로도 관객을 낚을만한 제법 괜찮은 예고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처럼, 아직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 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발신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진공 상태에서 그럴싸한 장면이 만들어 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의미심장한 장면이란 실상 의미심장해 “보이도록” 각색하는 대략의 술수 일지 모르니 말이다. 작가가 은근하게 신경 쓴 포인트를 전혀 모르고 지나친다고 해도 그것 또한 괜찮지 않은가 하는 체념 섞인 관람평이라고 해도 좋다.
그림을 보는 동안 보통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대단한 삶의 비기나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지 못해 실망할 일은 없다. 작가가 의도한 약간의 과장과 생략, 대단치 않은 시각적 장치만으로 손쉽게 낚인다거나, 가볍게 정한 비유적인 제목이나 설명을 한껏 오해하여 엄청난 의미부여를 한다고 해도 그저 그만이다. 뉘앙스를 공유하는 선에서 작가도, 관객도 각자가 투영할 만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거나 금새 시나리오를 고쳐 쓸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우 내 완성한 최근작들을 살펴보면 다시금 익숙한 외곽의 풍경으로, 고요한 세계로 회귀한 것 같다. 그러나 또 어딘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있을 것 같은 형태의 작은 교량의 하부와 수면에 비친 모습을 대칭적으로 그려낸 작업 <도금>(2023)이나 재개발 구역과 인가가 공존하는 교차적 풍경을 그린 <시작에서의 끝>(2023)은 지역의 주변부 풍경을 사실적인 화풍으로 담담한 분위기로 다루고 있다. 삶의 반경에서 자꾸만 밀려나고 지워지는 풍경들은 어쩌면 가장 급변하는 현실의 한 조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나는 작가가 꼭 지역의 문제나 젠트리피케이션, 불균등과 소외와 같은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기 위해, 예술가의 소신을 지키며 최소한의 사회적 발언을 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화면을 완성한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서완호, 시작에서의 끝, Oil on canvas, 181.8cm×227.3cm, 2023
변화의 폭이 가파르지 않은 그의 작업들은 영악스럽게 예술동네의 세태를 반영하거나 급작스레 방향을 선회하는 법이 없다.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 다닐 수 있는 여지를 그림에 남겨두고, 각자의 시나리오에 따라 작가의 화면이 누군가의 장면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최대한 비워내는 선선함이 서완호 작업의 본질적 특질이자 독자적 뉘앙스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하루하루 치밀하게 쌓아올린 그의 그림이 조금은 아스라한 느낌을 주는 것도, 순도 높게 채색된 화면조차 조금은 비워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술대학 졸업 이후 다양한 전시 참여와 창작 이력을 쌓아가는 다수의 작가들처럼 서완호 역시 회화적 테크닉의 숙련과 풍경화의 서사 발굴, 비평적 담론 사이의 정합성을 오랫동안 고민하며 그 사이에서 다양한 시도를 왕복해왔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잘 그려내고 싶은 회화적 충동과 왜 그것을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가에 대한 자기 설득, 회화 장르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비평적 성취 지점에 관한 삼각 서사는 줄곧 완벽한 균형을 찾지 못한 채 작가로서의 삶을 혹독하게 채근하고, 서로 상충되는 욕망을 부추기고, 어느 순간 신묘한 깨달음에 접속하는 듯한 순간도 지나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기를 전후로 오히려 풍성해진 것 같은 작업의 볼륨과 세계에 대한 사색, 미묘하지만 분명 새로워진 시도들은 작업을 대하는 여유로움에서 나온 것일 테다. 그러나 동시에, 초조한 마음 한 조각을 몰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빈 화면 위로 분주하게 대상을 옮겨내고, 알맞은 감각으로 채색을 마무리하는 매일의 창작 노동 끝에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작업 속에서 끝내 지켜내야 하는 모호함의 총량을 수긍하고, 때로 공격적으로 작업을 방어해야만 하는 있는 시기에 와 있기도 하다.
‘대략적 각색’이라는 영화 용어가 있다. 작가가 얼마만큼 동의할까 싶지만, 원전의 이야기로부터 아주 주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많은 것들을 바꿔버리는 영화적 각색의 개념으로부터 현실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변환시키는 일종의 도약의 과정을 투영해 보게 된다. 상당히 정밀한 화풍임에도 불구하고 썩 리얼해 보이지 않는 서완호 작업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사실적 재현이 촉발시키는 강력한 서사와 심리적 환기에 있음을 거듭 밝힌 바 있다. 이제 그림의 향방은 기록과 재현, 묘사의 치밀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은폐, 축소, 간과, 삭제야 말로 작가의 편집술에 담긴 중요한 요소라 여겨본다.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다루는 ‘척’ 하는 일은 실상 중요치 않게 넘어가는 ‘척’ 하는 일과 등가의 것으로, 현실의 대상이 회화의 영역으로 이행하게 될 때 작동되는 작가적 선택이자 대략적인 각색(脚色)인 셈이다. 도시와 지방, 중심부와 주변부, 장소성과 장소성의 상실, 개발과 폐허는 실상 물리적/개념적 짝패이므로, 실은 무엇을 그린다 해도 여집합의 그림자는 하나의 쌍으로 끌려오게 된다. 캔버스 바깥에서, 배경으로 밀려난 희멀건 그림자로, 물감으로 덮어버린 그 무엇으로, 쓸데없는 것들은 정밀하게, 중요한 것들은 대략적으로, 꼭 필요한 이야기는 가뿐히 건너뛰고, 중요한 복선은 클리쉐처럼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이라면, 성실한 필치로 일궈낸 회화적 각색이었으리라 믿는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화면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것들은 모조리 맥거핀(MacGuffin)
[1] 일 수 있다며 치부하며, 나는 작가가 정성스레 채운 캔버스 면에서 밀려나고 지워진 존재, 그가 손쉽게 건너뛰고자 했던 것들과 힘들게 잊어야 했던 세계를 떠올려 본다. 걱정과 불행, 후회와 갈등이 존재하는 보통의 삶, 눈부시게 발전된 세계의 폭력적 일면 중 아주 일부가 작업을 위해 허락된 시간과 공간 안에 담길 것이다.
이윽고, 전시장 안에 펼쳐질 시공의 조각을, 서완호가 그러모아온 세계의 파편들을 정성스레 붙여본다. 전시로 대변되는 완벽한 장면에서 어느 날의 흐릿한 화면으로, 사람과 풍경, 시간이 뭉개진 순간으로 흩어지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각색이 대략적일수록 우리의 감상은 치밀해지기 마련이므로.
[1] 맥거핀(MacGuffin)은 영화 등의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이다. 즉, 맥거핀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관객을 의문에 빠트리거나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사건, 상황, 인물, 소품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감독은 맥거핀에 해당하는 소재들을 미리 보여주고 관객의 자발적인 추리 형태를 통해서 서스펜스를 유도한다.
*전북도립미술관 <전북청년 2023> 도록 집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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