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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Aug 18. 2023

김슬기:오늘의 조각 레시피 – 괴식 Vs. 미식 편

김슬기 작가론

오늘의 조각 레시피 – 괴식 Vs. 미식 편



글 조주리

 

 

김슬기의 전시 <City Recipe>(202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릴레이 개인전)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동안 제목의 산뜻함에 이미 절반쯤 설득된 기분이다. 전시장 너머의 계절 풍경을 말갛게 투과시키는 아크릴의 물성과 주변으로 침투되는 금속 재질, 공간 전반의 가붓한 밀도 때문인지 김슬기의 조각은 보는 이를 압도하지도, 그렇다고 만만해 뵈지도 않는다. 불륨과 무게, 깊이가 제거된 듯한 착시를 주는 가벼운 사물들은 단단하게 여며진 공기주머니처럼 매달려 있고 때로 실바람처럼 공간 속을 흐른다. 


세계 저편에서 누군가 가지고 노는 교구(敎具)거나 그네들만의 법칙으로 구성한 우주이법의 시각화, 그도 아니라면 만물상점의 진열대에 놓이기를 기다리는 오브제라도 되는 것일까. ‘레시피’라는 말의 함의를 이리저리 넓게 열어보면서 조금 더 설득될 채비를 마쳤지만, 작업과의 거리는 손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전시장에 놓인 다양한 것들은 기실 도시 풍경 속의 형상, 형상의 일부분, 부분의 또 다른 지점들을 모조하고 변형시킨 것이다. 낯선 비율과 크기, 높이, 각도로 배열된 것들의 집합적 인상은 도시의 기념비가 갖는 묵직한 역사성이나 영웅주의적 조각 이미지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적당히 장식적이고, 때로 상투적이며, 일순간 냉소적이다.


아크릴과 FRP(섬유강화플라스틱), 가공된 석고와 황동 같은 재료로 만든 일련의 입체물은 작가가 사투 끝에 내놓은 습작 내지는 마땅한 용도를 추정할 수 없는 업체의 제작 견본 같기도 하다. 지나친 정성을 쏟아 붓지는 않겠다는 약간의 냉소, 그럼에도 놓칠 수 없는 ‘멋쁨’이 살아있는 김슬기의 ‘가니쉬’(Garnish)를, 그가 고안한 조각 ‘레시피’를 어떤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김슬기, <빌딩 가니쉬>, 2022, FRP, 황동봉, 43 X20X20cm


전시는 조각에 관한 조각을 다루고 있다.무엇보다 새로운 전시는 작가의 조각적 실험 경로를 중계하는 최신상 플랫폼이다. ‘토템’에 대한 탐구나 SF적인 서사를 드러내고자 했던 이전의 창작적 시도에 비해 도시의 시각 환경에 직접적으로 주목한 이번 전시는 외견상 어떤 변화 지점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재료가 가진 시대적 이미지를 교차하여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 범위에 대해 주목”하겠다는 작가의 쟁점은 일관되어 보인다.


더불어, 조각 매체의 조형적, 사회문화적 유산을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태도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다. 가령, ‘젊은’ 작가로 그룹 지워지는 세대의 창작자들은 무엇을 획득하고,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일까. 어쩌면 특정한 의제로부터의 탈피나 극복을 바란 적 없이 작업이란 그저 무심한 놀이나 개념적 활동인 것은 아닐까하는 포괄적 질문이 생겨난다. 


즉, 공공 조각의 레거시(legacy)를 무겁지 않은 터치로 ‘주물럭거리는’ 유희적 태도 안에는 대다수의 조각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장식 미술의 특징을 계승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어깨에 지고 가겠다는 과도한 책임감 같은 것이 애초에 설정된 적이 없었을 수 있다. 그 경우,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점을 넘어섰다고 하는 표현도 성립되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과도한 평론적 기대일 뿐.


다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쉽게 닳지도, 제거되지도 않는 지극한 물질 덩어리인 조각의 유산을 이어받은 세대가, 부모 세대가 만들어 놓은 도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골몰하는 일이란 더 얇고 가볍게 조각의 몸덩어리를 두드리고, 피고, 녹이고, 휘고, 날아가게 만드는, 일종의 액화술/기화술에 진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각각의 것에 깃들어 있는 역사적 기원과 아카이브의 덩어리를 파편 단위로 환원하고 위계 없이 섞고, 나열함으로써 오래된 총체성을 파괴하고, 제작자의 신체적 개입에 대한 상상을 지워냄으로써 인격성을 지워버리는 일. 대책 없이 터전을 불태우고, 벽을 부수는 일 따위 보다, 그것들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오늘날의 장인성(artisanship), 창조의 발현 지점일 수도 있을까 하는 긍정 어린 추론을 해본다.


전시를 통해 우리는 김슬기가 흥미롭게 바라본 도시의 구조적 일면과 누군가 조각 혹은 예술작품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일상적인 것 안에 깃들어 있는 조각적 속성을 따라가게 된다. 한번쯤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마련인 ‘도시’라는 광활한 주제 안에서 어느 순간 돌출되어 보이는 시각적 특징, 교과서적 조형 기법, 사회문화적 시각 언어를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재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흥미롭다. 


시나브로 양식화된 것들, 가령 ‘반달리즘’의 에너지를 상실한 그라피티 월, 오래된 신도시 지하도에서 마주칠 법한 타일 모자이크, 전국 어디서나 비슷한 형태로 납품된 것 같은 서양식 분수와 도시 조형물, 보험 회사 앞의 고전적 추상 조각들, 실질적 기능을 위한 것인지 장식인지 더 이상 구분이 안되는 산업 구조물의 의장을 떠올려 보자. 재료의 물성과 합일되는 건축적 텍토닉과 시대 양식을 다루는 창작자에게 아마 그보다 풍성한 아카이브는 없을 것이다. 




저마다의 것들은 그 자체로 조각적이며, 동시에 반 조각적이다. 곳곳에 서있는 입체적 구조들은 토목적인 이유나 공공 건축물과 같이 구체적 쓰임새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기념비를 본뜬 장식에 수렴되거나, 때로 최소한의 용도마저 탈각한 개념적 부산물, 맥락을 알 길 없는 추상적 덩어리로 변모해간다. 오늘날의 조각은 미술사 서적보다 어제의 도시를, 내일의 폐허를 닮아 있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적 재료와 제작 공법으로 의태(擬態)된 김슬기의 풍경 조각 앞에서 나는 ‘분자요리(分子料理)[1]’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끊임없이 맛의 질감과 경험을 변주하고, 감각적인 플레이팅에 힘쓰는 요리사의 과업과 조각가의 생리를 견주어 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괴식일지 미식일지 모를 그 유별난 감각의 분할과 과도한 레이어링 때문에 본체를 알 수 없는 오늘날 예술(혹은 예술적 요리)의 모호함을 긍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김슬기, < City Fountain>, 2022, 아크릴, 스테인드 스틸, 56X 220 X 77cm


 “서사를 발산하는 조각”에 관심이 있다던 김슬기의 그 단순한 말을 끄집어내며 거품으로 분산되었다, 단단한 질감으로 냉각되고, 종국에는 희미한 질량과 뉘앙스로만 남게 된 한 접시의 분자 요리와 오늘날의 미술을 연합해본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이 지독한 통속의 세계에서 나는 몇 번이고 새로운 형질로, 그에 따라 새로운 서사로 거듭나는 조각의 가변성과 해설의 허구성, 관람의 연극성 사이를 헤쳐나간다. 



작가에게나 관람객에게나 지나친 미식은 괴식이 되고, 과감한 괴식이 때로 미식으로 변모하는 경험이 자라날 것이다. 김슬기의 바람대로, 어느 방향에서든 서사의 결이 증폭되었다 축소되는 다채로운 질감의 변화가 생겨나기를 함께 기대해본다. 맛을 섬세하게 분별하고 입체적으로 종합해 내는 좋은 테이스트가 우리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기왕이면 괴식보다는 미식 쪽이면 좋겠다. 식극(食戟, 요리를 통한 대결)은 대체로 질리지 않는다. 



          


[1] 1988년 프랑스의 화학자 에르베 티스와 헝가리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가 요리의 물리, 화학적 측면에 대한 국제 워크숍을 준비하던 중 이 분야에 적합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분자 물리 요리학'(Molecular and Physical Gastronomy)이 탄생하였다. 음식 재료의 질감이나 조직을 물리, 화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을 조합시켜서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요리법으로, 단순히 열을 가해 익히거나 기름으로 튀기는 등의 일반적 조리방식보다 수 단계 심화된 조리법을 사용하여 식재료의 텍스쳐나 향 등을 변화시킨다. (설명 출처: 구글 검색)


*2022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의뢰 원고 (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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