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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밀어도 지지 않고, 쓸어도 차오른다

by jr united

영등포문화재단 문화도시

2025 예술기술도시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밀어도 지지 않고, 쓸어도 차오른다


Shadow under the mountain, Light upon the water, Scent from the Moon and it won’t fade, still rises



기획의 글


‘길이길이 번영하다’는 뜻은 영등포의 지명 속 ‘永登(영등)’이 지닌 일반적인 풀이이자 바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행정구역명인 ‘영등포구’를 다시 띄어 써보면, ‘영등’과 ‘포구’의 결합으로도 읽힌다.


한때 이곳이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는 사실, 그리고 지역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영등제가 열렸다는 풍문이 지금의 지명 속에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있다.


전시의 표제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은 지난 몇 달간 이 지역에 모인 창작자들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오늘날의 도시를 탐색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심상들의 집합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얼핏 순차적으로 보이는 단어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며 ‘산 볕’, ‘물 그림자’, ‘산 내음’, ‘달 그림자’ 등으로 변주되며 다양한 풍경을 창출한다. 최신 기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등장한 이 단어들이 반(反) 도시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오히려 역설적이다.


작가들이 응시하는 대상은 절멸한 것들의 흔적이거나, 거대한 무엇에 가려져 은폐된 것들, 혹은 주변부로 밀려난 것들이다. 산과 물, 달은 어쩌면 그런 존재들에 대한 가장 상투적인 대상이자 최후의 메타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표상들이 단순히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자연이나 상실된 인간성을 향한 연민만을 투영하는 것은 아니다.


산등성이 하나 없는 서울의 평지, 영등포에 드리운 도시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삶의 요동이 사라진 강변의 안온함을 의심하며,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시시한 분투를 저 먼 행성과 연결 지으며 근격으로 당겨오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실증적인 기술문화적 쟁점이자, 입증된 현상과 해석에 대한 예술적 반론을 준비하는 오래된 습관과도 같은 일이다.


신기술이 작동하는 장소 역시 산과 물 사이에 걸쳐진 도시이자 비(非) 도시, 때로는 반(反) 도시의 영토라는 점에서, 영등포라고 하는 특정한 지역을 향한 관심은 결국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향한 공평한 시선을 전제한다. 따라서 시간과 장소의 경계에서 번성하고 쇠락하는 기술과 노동의 이야기는 특정 지역의 초상을 넘어, 지역을 초월한 보편의 서사로 확장된다.


전시의 부제, ‘밀어도 지지 않고, 쓸어도 차오른다’는 문장은 현실에 대항하는 결기 어린 외침이나 미래를 향한 선언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목격하고 실험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 온 과정의 기록이자,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상에 대한 보고형 문장이다.


도시 문명, 과학기술, 인간과 자연이 형성하는 다차원 방정식은 때론 파괴적 충돌과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각자의 자리를 팽팽하게 유지하며 존재의 좌표를 맞바꾼다 해도 일말의 공존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원거리의 대양과 메말라버린 도심의 포구, 가청 범위를 벗어난 달의 포효와 영등포 골목을 가르는 쨍쨍거리는 절곡음, 낮은 산 하나 없는 마을의 철근 콘크리트 산새 - 이러한 상상들은 도시의 광대한 시간성과 인간 존재의 하찮음 사이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한편, 우리 중 누군가는 복잡한 세속의 이야기를 날카로운 시어로 압축하고, 몇 마디의 단순한 리프(leaf)로도 긴 광시곡의 구조를 지어 올린다. 그 ‘누군가’의 몫을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며, 그들의 행위는 광폭한 사유와 천진한 실행을 담보한다.


그러나 질문은 쉽게 해갈되지 않는다. 그림이 시처럼 세상을 서술하고, 시가 음악처럼 삶의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예술이 기술을 의태하고 기술이 예술을 모방·학습하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예술과 기술이 본래 하나였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서로 다른 방향으로 총력전을 펼쳐온 그 ‘격차’를 기어이 좁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올해의 예술기술도시 프로젝트는 지역의 역사와 삶을 주춧돌 삼아 출발하며, 전시에 앞선 시점에서 짧은 제안 하나를 던진 바 있다.


“오늘날 기술문화가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그 출발이 나의 행복과 우리의 번영이었다면, 기술이 도달해야 할 지점 또한 먼 미래가 아닌 오늘 하루의 삶입니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써나갑니다. 예술적 상상과 실천을 더해, 나의 영토 안에 타자의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의 범주를 재조정하고자 합니다. 기술문화를 ‘시처럼’ 독해하고, 다양한 삶의 풍경을 ‘음악처럼’ 펼쳐나갈 창작자들의 제안을 기다립니다.”


그 제안의 단편들을 모아 조각처럼 굴리는 사이, 무더운 계절이 한바탕 지나간다. 불가근불가원의 자세로 관찰해 온 이들의 시점이 어느새 1인칭 시점으로 전환되고, 때로는 전지적 시점에서 원거리의 것들을 재구성하려 든다. 각자의 시점을 넓히고 좁히기를 반복하면서, 세계의 복잡성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큰 자만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 순간, 버석거리던 작업의 세계 안에도 그림자와 볕, 내음과 같은 물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영등포의 과거를 정처 없이 헤집으며 도시의 비정과 인간사의 고독을 그려낸 김승옥의 소설 『도시의 달빛 0장』(1977)을 떠올려본 바 있다. 어쩌면 그 역시 도시의 성장과 삶의 퇴락, 혹은 도시의 퇴락과 삶의 성장이 교차되기를, 그리고 결국엔 회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포구의 옛 정취는 사라졌고, 도시의 안면도 새롭게 단장되었다. 번쩍이는 광원과 해독 불가능한 시그널로 가득 찬 이 도시에서, 한낮의 태양도 깊은 밤의 달도 효용을 잃어버린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이 반갑고도 그립다. “밀어내도 지지 않는다”는 묘연한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쉽게 지치지 않고 어둠에 잠기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호명해 본다. 쓸어도 차오르는 것들의 자리를 응시해 본다.


2025년 오늘 하루, 객지에서 흘러온 이야기꾼들이 지지 않는 기세로 영등의 0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바삐 흘러가는 세계를 잠시 붙들어 매어, 그 순간을 기억하고 노래하기 위해 기술을 부리고, 그 기술이 만들어 낸 장단에 몸을 맞춘다.


시처럼, 음악처럼.



글 조주리(2025 예술기술도시 총괄기획)






전시개요


주최 및 주관: 영등포구, 영등포문화재단

사업명: 2025 예술기술도시

전시명: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일시: 2025.10.17- 11. 02. (월 휴관) 11am - 7pm

장소: 영등포구 내 하나로 마트 (서울시 영등포구 경인로 719)

무료관람


*작가: 김태희&김수빈, 김현석, NULL(남민오, 김윤하, 김혜원), 박심정훈, 박은영, 배진선, 백종관 , 손수민, 우주여행자 언해피, 이해련 , 임승균 , 전보경, 정아람, 조말, 차지량, 홍범, 최찬숙, 추미림, 신미정, 참새


*주요매체: 기술기반의 복합 미디어, 영상, 사운드, 라이트, 향, 퍼포먼스, 조각, 드로잉, 아카이브 설치 등


*전시구성

프로젝트의 창,제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리서치 아카이브와 신작 프로덕션, 초청작가 섹션 구성, 아모레퍼시픽재단 협력작업, 종근당 고촌재단 청소년 교육 프로젝트 쇼케이스 (바이오 오딧세이)


*프로젝트 배경 및 목표

2025년 봄부터 가을까지, 총 6개월 동안 영등포문화재단 주도로 주제 공모와 작품 선발, 워크숍 시리즈, 그리고 기획 전시로 이어지는 ‘예술기술도시’의 여정을 이어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참여작가들과 함께 영등포의 사회문화적 서사와 지역적 특수성을 탐구하고, 동시대 기술 발전의 쟁점을 교차시키는 ‘도시 읽기/쓰기’를 촉발하고자 하였다.

본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관계 맺기’의 위상학은 예술과 기술의 매개를 넘어서는 것이다. 지역과 기관, 지역과 작가, 기관과 작가, 나아가 작가 간의 연결까지 포괄하며, 오늘날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보편적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 동시에, 고유한 맥락 속에서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기획 전시는 작가들 간의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 상호 배움과 탈학습의 단편들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전시가 단순한 작품의 집합을 넘어, 지역과 삶, 나와 타인,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관계와 경계를 사유하는 중계의 장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서로의 작업 속에 생각을 투영하고 교차시키는 과정을 거쳐, 다양한 만남과 집단적 형성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변화·확장·충돌을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이번 전시는 영등포문화재단이 다년간 축적해 온 지역 연구와 기술 기반 작업, 더 나아가 예술교육을 매개로 한 활동을 전시 지형 속에 재수용함으로써, 전시의 지리학을 더욱 두텁게 겹쳐 놓는다. 궁극적으로 본 전시는 ‘관계적 지역학’의 가능성과 ‘기술의 생동성’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사유 과정을 따라간다. 관람자의 시선과 판단이 개입되어 평평하게 그려진 기술 기반 세계 지도 위에는 다시금 울퉁불퉁한 지역의 초상이 새겨지고그 위에 각자의 삶의 좌표가 놓이기를 제안한다.


(그래픽 디자인: 와이 팩토리얼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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