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북쪽 끝, 모현읍 깊숙한 곳에 작가 허명욱의 작업실'들'이 자리하고 있다. 구태여 복수형으로 지칭한 까닭은 작업실이 실제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작가의 아틀리에는 일반적인 작업실의 규모를 훌쩍 넘어선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일곱 채의 공방에서는 서로 다른 작업 공정이 진행되며, 모든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옻칠을 위한 전용 공간은 물론, 직접 설계한 가마와 출하를 기다리는 작품이 가득한 스토리지까지 갖추어져 있다. 또한 작가의 취향과 사물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쇼룸과 리빙룸, 그리고 전문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지하 전시장까지 둘러볼 수 있다.
일 년에 서너 번만 외부에 공개되는 이 작업실의 집합체는, 허명욱에게 오랜 세월 지켜온 성채이자 그의 작업들이 머무는 영지처럼 다가온다. 정교한 생산 체계를 갖추고 운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질서와 규칙은 외부인의 눈에도 분명하게 읽힌다. 그것은 의례에 가까운 작가적 수행으로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강박과 고집의 또 다른 얼굴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작업실 운영 철학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조형 해석이나 의미 분석보다는, 작업실·작가·작업이 맺고 있는 관계망에 주목하며 서술되었다. 더 나아가, 작가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운용하는지 또한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다. ‘7/24’라는 표현은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내내 쉼 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순환을 뜻함과 동시에, 지난 시간 작업실에서의 치열한 분투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약 15년 전 용인에 작업의 근거지를 마련한 이후, 허명욱은 매일 자신이 정한 규율과 질서에 따라 작업 세계를 일궈왔다. 고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루틴’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청년기의 전투적 경험과 맥시멀리스트로서 겪어온 삶의 다양성을 지나 도달한 질서이자, 생존을 위한 전략에 가깝다. 서울을 벗어나 마주한 이 작업의 풍경은 특별함, 그 이상이다. 당사자에게는 지겨울 법도 하지만, 이른 아침 직박구리와 박새가 지저귀고, 한여름 낮에는 꾀꼬리의 울음, 해 질 녘이면 개구리와 맹꽁이의 소리가 번져오는 외곽의 풍경이다. 자동차로 불과 5분만 나가면 금세 도시와 맞닿는 위치에, 의도된 단절과 고립의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물질로 환원되는 작업의 세속적 가치, 작가로서의 유명세, 운송과 보험, 중개와 세일즈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언제든 이 고요한 풍경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긴장 속에서, 작업 세계는 더욱 흥미로운 서사와 복합적 감상을 생성한다.
작업실 내부는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자족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활동이 매 순간 침착하게 이어진다. 하루에 한 번, 일련번호가 매겨진 작업의 표면 위에 옻칠을 더해 투명한 층을 조금씩 쌓아 올리는 일. 그날 하루 생산할 수 있는 만큼의 생활 기물을 만드는 일. 볕에 일부러 내놓은 조각 더미에 눈길을 주며 그림자의 경계를 살피는 일. 다가올 전시에 내보낼 작품의 부피를 가늠하며 공간의 여분을 계산하고, 남아 있어야 할 작품들을 수평과 수직으로 가지런히 쌓는 일. 이런 일들이 하루를 빼곡하게 채운다.
만약 누군가 이곳의 작업에서 ‘장인정신이 깃든 치열한 보살핌’을 기대했다면, 오히려 무심할 정도로 간결한 판단, 기계적 공정처럼 보이는 풍경에 놀랄지도 모른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오늘 하루의 몫이 아닌 듯하다. 겉으로는 부산스럽고 분산된 듯 보이지만, 곧 그것이 얼마나 정연하고 통합적인 질서인지 깨닫게 된다. 7/24, 즉 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잠들지 않는 작업의 시간을 공학적으로 설계한 이는 다름 아닌 허명욱이다. 호방한 풍모 뒤에 숨은, 집요한 창작 세계와 그 확장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비교적 늦깎이로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허명욱의 이력은 드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전 활동과의 연계 속에서 형성된 작업의 다원성과 총체예술적 지향은 오늘날 그의 작업세계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광고 사진,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등 폭넓은 관심사와 경험을 거쳐 형성된 그의 양식은 옻칠을 핵심 기법으로 한 평면 회화, 입체 조각, 생활 기물 제작으로 응축된다.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이력과 옻칠을 중심에 둔 공예적 성격의 작업은 대중적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의 스펙트럼은 그보다 훨씬 넓다. 허명욱 스스로도 자신의 작업을 ‘공예가’의 역할에 한정하거나, 매체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시선을 거부한다. 기존 미술 제도의 장르 기반 분류와 비평 방식은 동시대 예술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을 개념미술이라는 큰 틀에 놓고, 예술가의 수행적 결과물로 제시하려는 의도 또한 이러한 태도와 맞닿아 있다.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서 재료와 기법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변수다. 크기, 형태, 색채, 광택, 경도, 텍스처 등 작업의 외연을 이루는 요소들은 다양한 조건이 맞물려 산출되는 결과물이다. 작가의 일은 반복되는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사이의 함수를 간파하고, 결괏값을 조율하며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각 결과물에 미술·디자인·공예·협업품 등 서로 다른 라벨을 붙이는 행위는, 어쩌면 시각예술의 생산 방식과 소비 환경이 맺고 있는 복잡한 약속과 관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그날의 감정을 담아 직접 색을 배합함으로써 자신만의 색을 만들고, 이를 바탕이 될 매체 위에 겹겹이 바른다.…(중략) …작가는 특별한 조형적 구조 없이 오로지 옻칠에 수반되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물질성, 촉각성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서정적인 감수성을 색채로서 전달한다. 허명욱의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의 ‘삶’이다.”
이 글은 작가가 직접 건넨 공식 포트폴리오의 첫 페이지에서 발췌한 서술이다. 다른 자료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해도, 그 이상의 표현이나 보충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허명욱의 언술과 작업 공정, 그리고 작업에 관한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작업하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근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청취하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와 열을 맞추어 누워 있는 작업들 위로 밤새 무언가가 숙성되는 동안, 여전히 새로운 창작적 시도에 대한 갈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똬리를 튼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있어도 완벽한 실행은 없다. 다만, 웬만해서는 작업이 실패하지 않도록 대비할 뿐이다. 길고 긴 시간을 잘게 나누어, 그는 작업 위에 시간의 층을 한 겹씩 쌓아 올린다. 그렇게 겹겹이 중첩된 레이어는 수직적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지고 용해되며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차원의 빛과 명암으로 드러난다.
여러 시선을 통해 작업에 덧씌워진 말들은 누군가에게는 매혹적인 기원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것과 비교하거나 공격할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스스로에게도 족쇄가 된다. 한때는 나무랄 데 없는 적확한 자기표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해지고, 끝내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낡은 수사로 남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고된 노동에 기초한 예술을 설명할 때마다 반복되어온 ‘한국 전통의 손맛’과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표현, 그리고 《독짓는 늙은이》식의 문학적 서사. 이러한 언어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말할 수 있을까. 허명욱의 작업실, 그곳에 놓여 있던 정갈한 사물들, 그리고 웅숭깊은 작업의 풍경을 떠올리며 스친 단상이다.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떠올리게 할 만큼 분주하게 돌아가는 허명욱의 작업실. 조수들에게는 진지한 생계의 전장이자, 구경객들에게는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짜인 작가의 자전적 세트장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에게는 예술 철학과 비즈니스 체계가 서로 공명하는 하나의 세계관 그 자체일 것이다.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서너 시간마다 옻칠을 더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워크숍이자, 외부로 운송될 작품들이 적재된 값비싼 물류창고. 무엇보다 제주와 서울, 파리와 뉴욕을 거쳐 최종적으로 귀향해야 하는 ‘홈랜드’다.
허점투성이의 관찰자의 시선에서 적어내린 작업실 관찰기는 아직 미완이다. 섣부른 찬탄과 비딱한 오해, 지레짐작 속의 평가를 거치면서도, 나는 여전히 ‘작업실’이라는 이름의 성채가 퍽 아름다웠노라고 적어두고 싶다. 잘 가꾼 것들끼리 맺는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관계, 신중하게 쌓아 올린 하루하루의 무게, 공학적으로 설계된 프로세스의 정교함에 기꺼이 마음이 움직인다. 그 아름다움의 무게는, 그곳에서 반출되는 사물들이 어떤 라벨과 위계를 지니든 상관없이, 그 외양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리라.
차를 몰고 서울로 향하는 동안, 시끄럽게 울던 맹꽁이 소리도, 작업실 가득 배어 있던 옻칠 내음도 진작에 사라지고, 도시의 기계적 소음이 귓바퀴를 울린다. 전시가 차고 넘쳐나는 다음 계절이면, 먼 곳으로 실려 나갔다가 오래 후에야 다시 돌아오거나 누군가에게 귀속될 작업의 일생을 떠올린다. 그러면서도 바란다. 작가의 하루 스물 네 시간 가운데 서너 마디쯤은 온전히 고립된 순간, 침해할 수 없는 안식이기를. 그래야 어김없이, 왕성한 아침이 또 열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