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강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여전히 바스러지는 중이다. 단단해지겠다, 당차지겠다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바스러지는 중이고, 잠깐의 순간에 바닥까지 꺼지는 중이다. 스트레스는 머리를 너무 아프게 하고, 그건 곧 온몸으로 통증을 옮긴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스트레스 취약형 인간인 것이다.
고슴도치 며느리 일기를 쓰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되었다 느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어쩐지 내가 강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글쓰기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공감과 응원과 힘을 얻는다는 댓글을 보면 글을 쓰는 동안은 울지 않았는데 갑자기 10년은 참았던 것처럼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쓰기로 했다. 글을 쓰는 동안만이 아니라 나 자체가 단단한 사람이 될 때까지.
지난번 시모의 '전화가 힘드냐'라는 말에 '네. 힘들어요.'라고 말한 후 시모는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나는 캥거루 남편과의 약속으로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후 2주 간격으로 전화를 드리기로 하고 불안한 마음과 스트레스를 강제로 누르고 있었다. 전화기가 그렇게 무서운 물건인지 이전에는 몰랐다. 2주가 되기 이틀 전 주말 남편과 함께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드렸다. 혼자보단 같이 하는 게 덜 불안해서 남편이 오는 주말에 하기로 했다. 역시나 들려오는 말은 상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3일 만의 통화에 "아이고~ 오랜만이네"라고 하는 캥거루 부모라, 2주도 안 되었지만 1년은 된 것처럼 "아이고 며느리가 전화를 다 했어??"라고 전화를 받으셨다. 정말 옆에 누가 있었으면 최소 몇 달 만에 전화를 한 무심한 자식 내외로 생각했을 것이다. 불과 20분 전에 아들과 통화하셨고, 그 아들과는 거의 매일 통화하시고, 그 아들의 아내와도 결혼생활 1개월 차가 되기도 전에 5번이 넘게 통화를 했으면 적은 것은 아닐 텐데.
전화로는 김치를 주겠다며 가지러 오라는 말씀과 김치냉장고를 가져가란 말씀을 하셨다. 김치도 그렇지만 김치냉장고는 둘 데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자꾸 강요를 하신다. 두 분이 합창하듯 강요를 하시는 바람에 이번 주말에 시댁 친척 결혼식에서는 먹었던 뷔페 음식이 그대로 체하는 것 같았다. 싸주신 반찬의 절반이 곰팡이가 펴 쓰레기가 되었다. 나는 코끼리가 아니고 김치 먹는 하마도 아니고 그것들을 다 어쩌라는 건지 거절하는 것에까지 에너지를 쓰기 싫어 난감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전화 강요만으로도 삶의 의지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라 준다는 걸 받고 말고 하는 것에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여력이 없다. 남편은 필요 없다고, 안 가져간다고, 나중에 필요하면 말하겠다고 계속 거절하고 있지만 거절은 씨알도 안 먹히고 눈들은 나를 향하는데 나는 그냥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다른 것에까지 예민하게 굴고 싶지는 않은데 근데 정말 김치냉장고는 둘 데가 없다. 나는 그냥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을 열어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캥거루 가족끼리 알아서 하시길.
주말에 지방에서 한 시댁 친척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친정으로 향했다. 아직 내 짐이 거의 대부분 친정에 있어서 이참에 다 가지고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곧 있을 친정의 이사까지 겹쳐서 그전에 다 옮겨야만 했다. 밤이 되어서야 친정에 도착했다. 엄마는 명절상 같이 음식을 한가득 차려두셨다. 우리는 배 터지게 먹고 바로 잠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근처에서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남편은 출장지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는 남아서 짐을 싸고 이사를 돕기로 했다.
친정에 가는 게 시댁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일까? 왕초보 딱지를 붙이고 6시간이나 고속도로를 달린 것도 나인데. 드라마나 고부갈등 예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종종 나오곤 했는데 사실 나는 내가 나의 가족이 있는 집에 가는 걸 왜 배우자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를 하거나 눈치를 보거나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함께 결혼식을 봤던 시모는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전화를 해왔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받을 때까지 끊지 않겠다는 듯이 오래도 울렸다. 영화가 끝나고 남편이 시모께 전화를 했다. 친정엔 전날 밤에 도착했고, 전화가 온 시간은 그 다음날 낮이었다. 시모의 용건은 언제 올라오냐는 말이었다.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건 왜 궁금하신 걸까. 남편이 자기는 오늘 버스를 타고 출장지로 가고 아내는 남아서 이사를 도울 거라고 말했다. 그건 내가 결혼식장에서도 시부모께 했던 말이었다. 이해를 못하시는 건지 남편은 여러 번 아내는 남아서 이사를 돕고 며칠 후에 간다고 재차 설명을 했다. 아니 그게 그렇게 설명을 할 일인가. 나는 그새 또 내 마음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날 저녁은 남편과 내 친구와 함께 먹었다. 친구는 일찍 결혼해 이미 아이가 둘이고, 결혼 7년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지방 사람이라 친구들은 대부분 시댁이 시골이다. 결혼 전에는 시골에 사는 시댁이 더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시골 시댁이 더 자유로웠다. 시골은 오히려 일 때문에 바빠서 자식들이 알아서 잘 살기만 바라고 크게 터치나 연락은 없는 것 같았다. 친구는 자연스럽게 아이 계획을 물었다. 우리는 아이 계획은 아직 없었지만, 낳게 된다면 한 명만 낳자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그 얘기가 나오자 지옥이 예상되어 심각해졌다.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 아주 예뻐 죽겠는 캥거루 아들이 자식을 낳으면 캥거루 부모는 아들과 손주에게 얼마나 더 집착을 할 것인가. 얼마나 더 자주 전화를 하고, 오라고 하고, 찾아올 것인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얼굴이 창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 전에 시댁 아파트 다른 층에 집이 나왔다며 그쪽으로 이사오라고 했던 말까지 떠오르며 온몸이 굳어감을 느꼈다. 내 얘기를 들은 적 있는 친구는 걱정되는 듯 눈빛이 바뀌었고, 남편도 아무 반론도 하지 못했다. 매번 아니다 안 그럴 거다 라고 하던 남편의 말이 모두 다 틀린 말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남편도 더는 쉽게 '그러지 않으실 거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친구와의 식사가 끝나고 남편은 버스를 타고 떠나고, 나는 친구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와서부터 두통이 시작되어 약을 먹었으나 듣질 않아서 한참을 이마를 꼬집고 머리를 두드려 보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비관적인 생각으로 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행복한 미래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괴로웠다.
나는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말은 죽어라 듣지 않으면서 속은 짓무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웃겼다. 고집은 고집이고 유리멘탈은 유리멘탈이다. 내 머리는 내 삶을 지킬 것이고 괴로워도 버틸 거지만 내 몸은 모르겠다. 나는 스트레스 취약 생명체다. 여태껏 별 이상한 증상으로 이런저런 병원에 다녀봤지만 다 스트레스를 들먹였다. 갑자기 결혼생활이 정말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함이 나를 등 떠밀거나, 병이 나거나 어떻게든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남편에게 다 말해버렸다. 이 스트레스가 나를 어떻게든 죽일 것 같다고. 둘이 저 멀리 외국에 가서 살면 좋겠다고 했다. 전화기를 없애버리고 싶다고 했다. 이제 친정이 이사를 가면 내 방도 사라져 나는 너무 괴로워도 도망갈 곳이 없다. 나는 끝으로 내몰리는 기분을 느꼈다. 신혼집이 우리 집이고, 신혼집의 방이 다 내 방이라고 해도 들리지 않았다. 그 집은 나를 숨겨주지 못한다. 나는 이 불안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의 답은 "일요일에 맛있는 미트볼 스파게티 만들어 줄게. 다 세팅해놓을 테니 푹 자고 일어나."였다. 그리고 출장에서 돌아오면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자고 했다. 같이 행복해지자고 했다. 계란후라이도 태워먹는 남편의 미트볼 스파게티 말에 시커먼 아이라인 눈물을 흘리다가 어이없게 웃음이 터졌다.
우리 둘만이었다면 정말 행복한 신혼이었을 텐데. 우리가 함께 한 5년 8개월 중 가장 즐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나는 과연 남편만 보면서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남편과의 나이 차이만큼 늙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