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 달달함 = 무뎌짐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던 날들은 지났다. 그렇게 많이 먹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생긴 우울증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어릴 때는 우울한 노래를 듣거나 우울한 글을 찾아 읽었다. 노래 가사에서 애써 공감을 찾아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랑타령이 전부인 노래에서도 단 한 줄의 위로를 찾아내어 스스로 위안받았다. 조금 커서는 슬픈 영화를 보고 엉엉 울었다. 봤던 영화라도 상관없었다. 크게 울고 나면 습한 감정이 건조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다. 슬픈 영화를 보고 너무 심하게 울고 슬프고 나면 몸살이 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을 영화관에서 보고 며칠을 앓았던 것처럼. 그래서 언제부턴가 슬픈 영화나 드라마는 거들떠도 보기 싫어하게 되었다. 티비 드라마는 물론이고 영화도 장르가 가족, 드라마라고 적혀있으면 거부감이 들었다. 요즘에는 어떤 방법도 쓰지 않는다. 가끔 이렇게 아무 말이나 쓰거나 그냥 우울한 생각에 스스로 잠겨버린다. 우울한 감정에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고 다시 깨어난다. 어쩌면 내가 나를 다독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위로도 위로가 안 될 때는 그냥 가만히, 가만히 있는다. 성격에 따라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거나 웃으면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나는 가까이 사는 친구가 없고, 결혼을 한 친구들은 내 푸념을 받아주기엔 이미 너무 가족에만 충실한 사람이 되었다. 부담이 되긴 싫고 나 또한 부담스러워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게 더 편해졌다. 사실 내가 가진 그 어떤 우울의 원인도 타인에 의해 해결되진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 것을 잘 못 먹던 내가 달달한 음식을 잘 먹게 된 것도 혼자 우울을 이겨내려고 애쓰던 중에 변한 것 중 하나이다. 달달한 믹스커피나 초콜릿 같은 것, 카페에서 휘핑크림이 잔뜩 올려진 음료를 먹는 것. 몸이 이게 뭐냐고 잔뜩 웅크리는 기분이 들지만 개의치 않고 흡입하여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그러면 어쩐지 내 기분도, 감정도 무뎌지는 듯한 멍한 기분이 드는 것. 그렇게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어 오늘의 우울을 잊는 것. 그게 내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