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차부터 시니어인가라는 고리타분한 논의는 뒤로 하고 시니어는 커리어의 끝이자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스타트업에서 시니어는 많지 않고, 그중 좋은 시니어는 더더욱 귀하다. 시니어는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는 현인이자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줄 등대 같은 존재이다. 물론 현실의 시니어는 그렇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니어에게 기대하는 바는 분명 그렇다. 리더와 중간관리자에 관한 글(리더의 불안감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 냉소주의에 빠지고 싶지 않은 중간관리자에게)에 이어 스타트업에서 시니어의 역할과 무게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스타트업은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빠른 성장은 필연적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개개인의 역량이 조직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성장이 이루어지면 조직은 많은 문제와 고민에 맞닥트린다. 개인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지만 조직이 모든 시행착오를 직접 겪을 필요는 없다.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직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는 없을까 고민한다. 조직의 모든 문제와 고민을 해결해 줄 마법의 단어, 시니어의 등장이다. 시니어 포지션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니어의 2-3배 연봉을 주며 그에 합당한 퍼포먼스를 보이기를 기대하는 회사와, 혼자서 조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시니어 사이의 갈등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까.
시니어는 best practice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Best practice는 문제 상황에 대해 가장 좋다고 알려진 모범사례를 뜻한다. 조직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best practice를 빠르게 찾는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best practice가 항상 정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이 주관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과 객관식 선택지 중에 정답을 고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best practice를 제시하는 건 시니어의 기본 덕목이다.
동시에, best practice 이면의 맥락과 원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best practice가 항상 정답은 아니다. 조직이 처한 문제 상황은 대체로 더 복잡하다. 즉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다라는 답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다른 가능한 대안은 어떤 게 있는지 등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 좋은 예시로 보통 A, B, C의 가정 하에서 1, 2, 3안의 선택지가 있는데, 1안의 경우 이런저런 문제가, 2안의 경우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 3안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기는 하나 이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선택지이다 같은 식의 설명이다. 그 기본 틀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우리 회사는 A, B, C 모두에 해당하는지, 1안의 문제가 정말 우리 팀에 큰 문제인지 등등 다양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그냥 공식을 잔뜩 암기한 수험생에 불과하다.
당장 필요한 일과 급하지 않은 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일들도 그 안에서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주니어는 모든 걸 잘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시니어는 지금 우리 조직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는 산재한 일이 있고 손은 항상 부족하다. 선택과 집중은 언제나 옳다. 더 나아가 다른 구성원이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면 세심하게 챙겨 팀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역할까지 기대된다. 회사의 모든 일이 무결할 수는 없다. 해야 되지만 못하는 일,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 되는 일 투성이다. 다른 회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현실은 그 속에서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과, 아쉬운 대로 못 본 척하며 넘어가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시니어도 사람이니 당연히 모르는 게 있다. 특히 조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잘 모르는 영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본인이 모른다는 걸 모르거나, 말하지 않고 감추거나, 아는 시늉을 하거나, 다른 이유를 들며 좋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건 조직을 좀 먹는 행동이다.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르는지만 분명히 하면 팀 내에서 머리 맞대고 정답은 찾을 수 있다. 모른다는 말이 시니어로서의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로 떨어질 권위라면 애초에 권위가 없었을 확률이 높다.
내게 익숙한 것과 조직에 필요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 연차가 높고 경험이 많을수록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새로운 조직에 합류해 조직을 본인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려는 경우가 있다. 본인이 편한 언어로 프로젝트를 엎거나 (보통 리더에게 이대로 가면 망한다며 잔뜩 겁을 주고 신규 피처 없이 대규모 벽돌공사를 시작하는데, 좋게 끝나는 꼴은 보지 못했다) 개발 주기나 커뮤니케이션 방식 등을 손본다. 그러나 모든 조직에는 개별의 역사와 성장해 온 경로가 있다. 본인이 불편한 건지 회사에 변화가 필요한 건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좋은 시니어는 팀의 정서적 안정감을 높여준다.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의 내부는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 유능한 주니어들이 상당히 많은 일을 개인기로 처내면서 회사를 어떻게든 굴리고 있지만, 정말 잘하고 있는지 이게 최선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불안감을 느낀다. 적절한 긴장은 팀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면 좋지 않다. 이때 큰 회사에서도 그렇게 해.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같은 한 마디는 조직에 큰 힘이 된다.
마지막으로 조직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본인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가혹한 말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주니어의 경우 조직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를 끊임없이 확인하여 불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만, 시니어는 해당 직무를 조직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시니어가 직무적인 가이드라인을 조직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스스로 필요한 역할을 찾고, 그 역할이 왜 필요한지 조직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조직의 리더는 고려할 변수가 더 많기에, 항상 원하는 결정을 내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가능한 선택지와 각 선택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전달해 줄 필요가 있다.
좋은 시니어는 그저 존재만으로 빛이 난다. 조직의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당장 필요한 일과 필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해 주며, 팀원들의 성장을 돕고 조직의 안정감을 높여준다. 단순히 조직의 구성원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질적으로 한 단계 높여주는 것이 시니어의 참된 역할이자 그 연봉의 의미이다. 물론 제대로 된 권한도 신뢰도 환경도 갖춰지지 않은 조직에서 시니어이니 알아서 잘하라는 만능도구 취급에 힘들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시니어도 기계는 아니기에 조직의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나와 핏이 잘 맞는 조직에,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합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런 조직을 선택하는 것조차 좋은 시니어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