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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에서 시작된 희망

2021년 6월부터 12월까지

by Helka

앤에게,


안녕, 앤.

이번에는 2021년 여름으로 돌아가볼게.

그때는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시기였어.


일을 하다보면 그런 시기가 있잖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들.

출근할 때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는데 숨이 막혔어.

'무얼 위해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지.

약간만 평균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도

금방 길을 잃고, 스스로 가둔 채 살 사람이란.


그래서 궤도에 올라서기 위해,

평범한 삶의 궤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어.

운이 좋은 듯 아닌 듯, 다음 단계로 진입했고,

그렇게 버텼어.


하지만 점점 지겨워졌어.

환경이 지겹고, 사람이 지겹고, 내 역할이 지겨워지고, 결국 나 자신마저 지겨워졌어.




그런던 어느 날, 하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급기야 내 수명까지 아깝게 느껴져서 나는


이야기 속으로 숨었어.

나를 가감없이 받아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도망이라고 해도 좋아.

푹신하게 누워서 다른 모든 걸 잊을 수 있잖아.

울창한 숲 속 흔한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한 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대산문화재단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고를 봤어.

알고리즘이 이끈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는 몰라.

그런데 가슴이 뛰었고, 혈색이 돌았고,

희망이라는 게 생겼어.

지금까지 해 본 일 중에 제일 힘들고 기쁘게 몰입했던 번역...

다시 해보자.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더 늦으면 정말 후회할 테니.




샘플 원고를 제출하려면 '우선지원 대상작 리스트'에서 작품을 골라야 했는데,

낯선 이름들 사이로 익숙한 라스트 네임이 눈에 들어왔어


브론테Brontë.

그런데 '앤 브론테Anne Brontë'라?


소설가 '앤 브론테Anne Brontë는 1820년에 태어나 1849년에 사망... '제인에어'의 샬롯 브론테와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의 막냇동생으로...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네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솔직히 속물스러웠어.

- '브론테'라는 이름이면 다른 검색 결과에도 잘 걸리겠지? -

불순한 의도와는 달리, <The Tenant of Wildfell Hall>과 함께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샬롯 브론테와도 에밀리 브론테와도 달랐던 너.

난 결국 너와 네 작품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어.


헬렌의 목소리는 여리면서도 선명했어.

게다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어.


액자식 구성도 물론 흥미로웠어.




그 여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번역했어.

여러 목소리로 다시 읽고, 계속 고쳤어.

아는 것도 의심하고, 모르는 것도 의심했어.

모든 과정은 제한 없이 반복됐고,

반복될수록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됐어.


그러는 중에도 난 줄곧 선명하게 상상했어.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는 나.

뽑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히는 나.

사람들 앞에서 작가를 설명하는 나.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완성하겠다고 다짐하는 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어.

그런데 기대가 너무 크면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잖아.

그런 이유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즐기는 이들의 모임'이 있다면 난 어엿한 정회원이었겠지만,

그 때의 난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지나치게 긍정적이었고, 약간은 흥분 상태였어.

희망이 없는 게 더 무서웠나봐.




가을이 한창인 11월 어느 날,

정확히 어떤 날인지도 모를 평범한 그날에

번역지원 대상작품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어.


난 별로 놀라지 않았어.

너무 많은 시뮬레이션을 해서인지 담담하기까지 했어.

어쩌면 겁을 내면서도 약간의 자신감이 있었을까?


그저 너와 다시 만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어서,

끝까지 가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었어.




이제 정말로 잉글랜드 이야기를 하자.

내 여행일지를 보여주도록 하지.


안녕, 또 봐.


Helka




P.S.


요즘은 라벨의 '볼레로'를 자주 듣고 있어.

(넌 알 길이 없지만, 들어보면 분명히 좋아했을 텐데...)

단순한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면서도,

점점 더 강렬해지고 결국엔 폭발하듯 끝나는 곡이야.

그 여름과 닮았어.

작은 조각들이 하나씩 쌓여가던 긴장감,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게 터질 것만 같던 그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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