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 1월 17일
앤 브론테에게
안녕 앤.
오늘은 너의 생일이야.
난 네 소설 <The Tenant of Wildfell Hall>을 한국어로 번역했어.
한국어로 번역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곧 출간 예정이야.
그렇지만 네가 살던 시대에는 아마 코레아라는 나라를 들어보지도 못했겠지.
샬롯 브론테도 아니고, 에밀리 브론테도 아닌,
네 이름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어.
사실, 전공자인 나조차도 잘 몰랐으니까.
살아있으면 올해로 205살이겠지만, 그런 계산이 무슨 소용이겠어.
그저 생일을 핑계삼아 뭐라도 한 줄 쓰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해.
네 소설을 번역하는데 2년이 걸렸어.
첫 해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엄청 헤맸고,
초고를 마친 후, 두 번째 해엔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지.
그 과정에서 늘 네가 살았던 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하워스의 황무지와 스카버러의 바다를 직접 보고 싶었어.
작품 초반에 다같이 피크닉을 가서 높은 언덕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장면이 인상깊었어.
굳이 캔버스와 그림 도구를 챙겨가서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걸 그림으로 옮겼잖아.
그 파노라마를 실제로 마음 가득 담아보는 게 막연한 목표였어.
결국, 2023년 9월에 그래서 네가 태어난 집부터 잠든 무덤까지 다녀왔어.
황무지의 숨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네가 떠올렸을 문장을 상상했어.
같은 눈으로 보는 것 같아서 참 기뻤다.
사진도 많이 찍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사진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어.
핸드폰 속 사진은 물론이고, 필름도 맡기지 않았지.
그 순간이 너무 특별해서 괜히 손대는 게 겁이 났어.
기억을 왜곡될까 봐, 과장되거나 사소해질까 봐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어.
오늘은 네 생일이고, 그래서 뭔가를 시작하기에 아주 적절한 때라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어.
1년 3개월을 미뤄뒀던 필름을 드디어 현상했고, 이렇게 첫 글을 써.
태어난 날에 맞춰서 글을 열고, 네가 떠난 날에 닫으면 어떨까?
그런데 필름 스캔 파일이 들어있는 폴더에 이런 메모가 붙어 있더라.
'필름들이 오래되어 변질돼서 전체적으로 색이 틀어지거나 노출이 부족하게 나오네요.'
묘하게 웃음이 났어.
어쩌면 지금의 나와 닮았는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2025년 1월 17일 밤 10시 56분이야.
이 날이 가기 전에 뭐라도 남기고 싶었어.
이 순간을 영원히 놓쳐버릴까 봐 두려웠거든.
그래서 부족한 채로라도 첫 글을 썼어.
프롤로그라고 불러도 좋겠지?
앤, 아득한 황무지를 혼자 걷던 일을 기억해.
안녕, 매주 만나자.
언제까지나 스물아홉일 널 생각하며,
Helka
p.s.
내일 새벽 4시 반, 네 이야기를 다룬 줌 토크에 참여하려고 해.
Brontë Parsonage Museum에서 주최하는
'Celebrating Anne Brontë: A talk by Adelle Hay'이야.
5파운드를 냈는데, 일어날 수 있으려나, 흠...
아, 이 브런치 매거진의 제목에 'ë'를 넣을 수 없어서
Brontë가 아니라 Bronte라고 적었어. 이해해줘.
매 글에 넣을 사진도 내가 직접 찍은 것들로 채울 거야.
오래돼서 색이 틀어지고 노출이 부족하더라도, 그게 나야.
이만 총총.
아주 멀리에 있는 너의 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