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가능하게 한 것,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

<미안해요, 리키>(2019)

by 수차미
2019112708491405870d3244b4fed182172186127-1200x.jpg <미안해요,리키>의 한 장면 © 엔터테인먼트 원



1.


켄 로치라는 사람을 두고 어떠한 수사를 덧붙이든 간에 그에게 성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사는, 육체적 늙음에도 여전한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인임에도 시대의 문제에 온전히 대응한다는 점이 그렇다. 쉽게 말해 노인 세대는 보통 현세대와는 세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는 단순한 일상 속 대화에서부터 광화문 광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격차를 포괄한다. 그런데 켄 로치는 동시대에 무엇이 필요한지, 영화에 무엇이 재현되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쉬운 말처럼 들리지만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지난날을 여전한 수사로 고집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변화에 대한 적응의 실패이기도 하고 거부이기도 하겠다는 점에서 늙음이란 가장 큰 완고이자 숙고임일 테니 말이다.


완고가 숙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만 숙고가 완고로 이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해본 것이라도 그게 틀리다면 언제든 내버릴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무엇이 맞고 틀린지의 문제가 그곳에 전제되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완고와 숙고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라는 점이다. 완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이는 성공하면 뚝심이 되지만 실패하면 아집이 된다. 반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은 결과가 좋지 않을지언정 그 노력의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어쨌거나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만든 영화라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 영화는, 켄 로치에게 있어 길거리에 반짝이는 돌맹이와 같아서 주워들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였을 것이다. 쉽게 말해 그것은 숙고보다는 완고에 가까운 결정이었으니 뚝심이거나 아집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2.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가며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미안해요, 리키>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개봉했지만, 원제로는 ‘Sorry, We Missed You’라는 이 영화의 본래 맥락은 다음 둘 중 하나로 읽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부재중인 이에게 남기는 이 메시지는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거나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인데, 전자는 비즈니스에 가깝고 후자는 전자보다는 인간적으로 들리는 문구다. 전자는 이미 놓친 상황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아직은 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이별의 순간에서도 익숙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맥락으로 보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멀리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돌아올 수 있는 선, 임계점을 넘어섰는지 아닌지와 같은 한계에 있다.


소위 말하는 ‘선’이라는 것을 넘어선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들 말하고는 하는데, 이는 선을 넘는 모든 종류의 행태와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인간의 형질이 본연적으로 변하게 되는, 스프링으로 치면 탄성계수를 넘어 원위치로 회복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켄 로치가 해당 문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영국 사회의 어떤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고 말하면 언제든지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말하자면 회복의 여지가 남아있는 희망적인 말이 되지만,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고 말하면 추후라도 만남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벽한 단절의 말이 된다. 예컨대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상대와의 관계가 완벽히 단절되기를 고지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3.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절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것에 반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핵심은, 단절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단절되기를 바라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의도적으로 서로를 등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삭막한 세상이 되어서일까. 조금 편견을 담아서 말하자면, 세상을 다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젊은이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과도 채팅 서비스를 통해 대화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니 말이다. 다르게 보면 디지털 서비스가 사람들을 더 잘 잇게 된 만큼, 더 잘 멀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함이 도출되는 현 상황에 대해 노감독은 어떤 한마디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채팅 서비스에서 개인은 개인의 표지를 명확하게 가지기에 발화의 책임과 경위가 개인에게로 돌려지지만, 현실에서의 대화가 다방향적이고 확산적인 성향을 띠기에 대화하는 장소의 주변부 사람들이 엿들을 수도 있는 것처럼, 디지털 서비스라는 건 자신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때 확실하게 전했다는 인식 또는 책임의 전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황금 종려상을 받았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모니터 안의 점과 선으로 지목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모니터 안의 디지털 시민을 조명하고, 카메라는 그 바깥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디지털의 반대편이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의 바깥’이라는, 도심의 외곽이라는 말을 했다. 쉽게 말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로 이행하게 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 시스템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아닌, 디지털이 주류인 상황에서 그 바깥으로 나가면 매트릭스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처럼 허허벌판의 고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에 동화되는 이들, 주로 젊은이와 같은 신세대만이 도심의 중심부 시온으로 진입할 수 있고, 그에 동화되지 못한 이들은 매트릭스라는 디지털로 세워진 환영의 도시로부터 내쳐져 알몸인 채로 야생에 버려진다. 물론 시대의 흐름인 만큼 디지털이라는 것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는 복지 시스템을 비롯한 전산이 모두 디지털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디지털 시민화에 근거한다. 디지털 전산에 등록되지 않으면 그는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되어버린다. 반대로는 사망했더라도 사망 신고를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노령 연금을 계속 타 먹을 수 있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예컨대 디지털 시대에 개인은 디지털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4.


그러니 나도 위의 두 표현 중 어느 하나와 끊어지고 싶지 않기에 적당한 표현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다른 이들이 그걸 이해해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미안해요, 리키>에는 주인공 사내에게 중간 관리자가 “고객들이 보는 당신은 손에 든 디바이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말에 따르면 택배기사인 그는 고객들이 거는 클레임에 감정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택배기사인 그를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 기계장치의 톱니 정도로 보고 있고, 따라서 고객이 그를 인격체로 보고 있지 않으므로 고객의 비난은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정이 디지털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모니터 안에서처럼 평균값으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기에 개인에게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고 시스템이 그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모니터 바깥의 삶은 모니터 안의 삶보다 치열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시스템의 바깥을 보듬는 것에 할애되어야 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마디만 하자면 디지털은 어디까지나 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한다. 현실에 쌓아올린 게 디지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시스템의 바깥을 보듬어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디지털이 아날로그에 손을 뻗는 행위를 두고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어찌 되었든 간에 구원의 시도는 이루어졌다는 것일 테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다.’는 말이 미안함을 어느 정도 담은 표현이라면,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는 어쩔 수가 없었다면서 책임의 행위를 외부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표현 중에서는 책임의 주체가 명확한 전자 쪽이 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임의 소재가 표면적으로나마 명확한 것은 바로 디지털이다. 아날로그 세계에서의 상이 오아시스 곁의 신기루처럼 아예 허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상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분열된 것이라는 점에서 어찌 되었든 간에 그 형체는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을 놓쳤다.’는 아날로그적 표현(택배 방문을 통해 남기는 메모이니)보다는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라는 디지털적 표현이 더 따스하게 들리는 이상한 상황이다.


5.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켄 로치는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아니었는가? <미안해요, 리키>를 통해 켄 로치는 우리의 그런 의문에 답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켄 로치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일 테고 말이다. 말하자면 켄 로치는 디지털 시대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는 그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이라는 게 아니라 이전의 관심사가 디지털 시대에 다른 방향으로 연장되었음을 알려준다. 켄 로치의 관심사는 언제나 시스템 바깥의 사람이었고 디지털 시대의 시스템은 디지털이니 디지털 바깥의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전의 아날로그가 주류이던 시스템 사회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와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런데 이건 디지털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나란히 두고 보면 아무래도 디지털 쪽이 더 사람들 간의 연결을 끊어놓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디지털은 초시대라는 이름으로 초연결을 행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많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육체적으로는 아니어도 통신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음을 논한다면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디지털 시대에는 육체가 밀접해 있지 않으니 감정적으로 무언가 단절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켄 로치가 눈여겨본 지점이다. 켄 로치가 <미안해요, 리키>에서 지적하듯이 디지털 시대에 완전히 접근해있는 자녀 세대에게 휴대폰이란 삶의 전체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한 편에서도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가 나뉘어 있고 그중에 디지털 세대에게 디지털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의 모든 것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 켄 로치가 눈여겨보는 것은 우리가 삶을 피폐하게 한다고 말해왔던 디지털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아주 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간명한 사실인 이유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것의 등장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6.


주인공 사내의 아들은 친구들과의 연락은 모두 휴대폰으로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의 만남과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디지털이란 삶의 전부이지만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이는 “현실은 언제나 현실에 있다”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사람의 말 (<레디 플레이어 원>)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면서도, 적어도 아직은 디지털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켄 로치가 정말로 보여주려는 것은, 디지털 사회에는 오히려 디지털 이전에 태어난 이들이 아날로그를 더 홀대한다는 점이다. 이는 택배 노동자인 주인공 사내를 택배 회사의 부속품, 택배를 옮겨주는 기계 정도로 취급하는 택배 수령자들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오히려 주인공 사내의 어린 딸이 그와 동행할 때 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전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자녀가, 아날로그로 진행되지만 디지털화된 미숙한 업무를 좋아한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있고, 디지털의 바깥에 아날로그라는 발할라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서로 보완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켄 로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켄 로치가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일종의 계급처럼 분화된 사회가 아니라 그 둘이 상호작용하며 집요하게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 관점의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켄 로치가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만들어야만 했던 작품이라는 점에 대한 설명은 될 것 같다. 켄 로치의 이전 영화가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라는 게 곧 정보로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 말하자면 전통적인 계급이 아니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세상이 삶을 갈라놓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켄 로치의 이번 영화는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 기술이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에는 사람이 자리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의 영토가 점차 넓어지고 있고 그중에는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남은 곳도 있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게 꼭 그런 영토의 흐름에 직접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켄 로치의 이번 공언은, 기술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보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러해야 한다는 이전 작품에서의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그는 기술이 가능하게 한 것들이 아니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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