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로부터 시작하자 이 세계 생활

<82년생 김지영>(2019)

by 수차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을 두고 크게 두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적 분류가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 하나는 작품의 주인공에 직접 이입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주변인물에 위치하는 부류이다. 여기에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현상이 있고, 이 현상을 둘러싼 관찰자적 위치가 주변인물로 표현된다. 이때 현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살펴보자. 작품의 주인공인 김지영(정유미)이 겪는 여러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주제를 가리키기에 그것은 연대의 형태를 취한다. 어떤 면에서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모습은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올 때 지면을 잃고 현상에 가까워진다. 글의 영상화라는 소설의 영화화에서 이미지는 영화의 바깥에 자리한 여러 사건을 자신에게 투영시키고, 종국에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현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한곳에 가두어 두는 게 연대의 형태이다.


영화의 제목은 이것이 80년대에 태어난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포스터의 ‘당신과 나의 이야기’라는 문구를 보면 이것이 모든 여성의 이야기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이것을 여성 전반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확장하고 싶어한다. 영화는 유리 천장과 맘 카페, 시어머니와 친어머니, 자매와 남매를 보여주면서 개인의 시야를 연대하는 개인으로 바꾸고자 시도한다. 예컨대 이는 연대하는 개인의 이야기다. 여기에 화장실 몰래카메라나 카페 안에서의 맘충과 같은 ‘현실 세계에서 가장 근거리에 존재하는 문제’가 끌려온다. 영화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데 아마도 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거나 또는 그럴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암묵의 항의표시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오히려 문제의식을 그런 현상에 덧입히면서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이 점이 영화에 대한 논쟁을 불러오는 것일텐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가 제안하는 김지영의 모습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주변인물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는 현상의 주변인으로 머물게 하며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크린 안에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을 둘러싸 연대를 이루는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가 제시하는 게 김지영의 모습이나, 이는 그녀의 주변인물이 있기에 사건이 보조되고 회상되며 시야에서 단편적인 모습을 비춤으로써 개인의 선택지에 일종의 발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주변을 단편화했다는 점을 빼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나를 둘러싼 자장에 정도 너머로 접근하지 못하는 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부분이다.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이쪽에서의 척력과 저쪽에서의 인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보는 이 현상이 세상을 밀쳐내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에게 다가서는 주변인물을 뜻하는 것이니 말이다.


김지영의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주로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보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 그의 거리감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는 여러 상황으로 변주되는데 몇 개의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는 한집에 살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아내와 남편의 심리적 관계를 보여준다. 공유가 자상한 남편으로 나와 아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노력이 아내에게 닿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회사에서 유리천장을 겪는 김팀장에 이입하는 구도이다. 이 구도는 내가 서 있는 곳과 내가 지향하는 곳이라는 두 개의 장소를 지정함과 동시에 그사이의 거리를 꿈에 대한 목표로 채운다. 영화는 김팀장이 회사를 나와 세운 곳으로 재취업하려는 김지영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걸 토대로 극의 주된 갈등을 진행시키는데, 종국에는 김지영이 회사에 취업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김지영이 딸을 유치원에 데려가던 모습에서 육아 휴직한 남편이 유치원에서 딸을 데려오는 모습으로, 주방에서 시작해 베란다로 옮겨가는 것으로 시작하던 오프닝 장면을 엷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바꾸며 극이 진행되는 동안 김지영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멀리 있던 것을 내 쪽으로 당겨오는 것이 바로 변화이고, 그런 변화가 의미하는 건 바로 행복인 셈이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는 ‘일어났다’라는 현상이기에 변화의 의미와는 다르다. 행복과 행복해진다는 개념이 다르듯이 유령의 존재와 그런 유령을 본다는 것에 대한 개념은 다르다. 이를테면 본작에 채용된 빙의라는 컨셉은 김지영의 몸을 빌려 말하는 주변세계의 여러 망자들, 중심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소문의 형태로 떠돌게 된 이들을 스크린 위에 불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소설에서는 김지영의 입을 빌려 인물과 분리된 사건을 하나로 잇는 역할을 했다면 영화에서는 그 고리가 약하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게 자연스러운 독백이라면 영화에서 그것은 대체로 허용되지 않고, 그 이유는 구현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할 수 없는 비언어적 표현을 영화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연기가 요구되는 매체이고 그래서 발화하는 주체를 보여주는 방법은 방의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어야만 했다. 이때 가장 먼저 생각해볼 것은 영화라는 매체는 영화관이 우리를 탈신체화하며 유령의 형태로 만듦과 동시에, 그런 영혼이 일시적으로 개입할 장소가 바로 스크린이라는 점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채용된 빙의라는 형식이 영화에 그대로 옮겨가는 순간,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것은 잔상으로만 남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입할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으로서 우리 세상의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되고, 이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입이 아니라 투과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본래 영화를 말할 때 원작을 꼭 보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본작의 작품 포스터가 100만 부 이상 팔린 소설 원작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작과의 연결고리는 전면에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원작과 영화가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따져 보는 게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실례되는 행동일 수 있지만, 소설과 영화의 차이가 어떨지에 대해 간단히 물을 수는 있다.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면 본작이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위해 이미지 위주로 시퀀스를 재편성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원작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딱히 몰라도 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이유로 원작과 영화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성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바깥쪽에 관심을 두게 되는데 그게 바로 카메라이다. 소설에서 시점이라 불리는 관점의 존재는 영화에서 카메라라는 명백한 객체로 나타나며, 이는 카메라가 때때로 자아를 갖는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예컨대 소설이라는 매체가 독자의 머릿속에 직접 이미지를 현상한다면 영화라는 매체는 카메라를 중간에 거치기에 직접적으로 이미지가 구현되지 아니하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에 다가서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이입하려는 곳에 이미 낯선 이가 있다. 나 자신의 예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 때,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낯선 모습이 발견될 때, 또는 변해버린 나의 모습을 자각할 때. 이 모든 것은 내가 대상과 객체에 부여한 이미지-영혼이 무참히 깨어짐에서 오는 일종의 괴리적 현상, 그 붕괴의 에너지를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객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건 바로 타자화된 자신이다. 예컨대 다른 이름의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으로부터의 감금에 해당한다. 비유 하나를 들자면 나는 여전히 나인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변했다고 말한다. 이때 변한 것은 나이거나 세상이겠지만 아무래도 후자보다는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므로 우리는 ‘내가 변했다’고 느끼게 된다. 본작이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도식으로 작중에서는 빙의로 칭해진다. 하지만 이런 빙의는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그것을 고지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위의 맥락과 차이가 있고, 따라서 기존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어느 날 아내가 빙의 증상을 보인다. 작품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빙의 증상을 빌려 주변인물의 감정을 김지영에게로 이입시키는 것, 말하자면 그동안 지나쳐왔던 여성의 모습을 내 곁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목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자신이 세운 도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듯 보인다. 김지영의 빙의현상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인물의 지인을 연기하지만 정작 주변인물은 그걸 티 내지 않는다. 지영의 남편은 정신과 의사에게만 지영이 연기한 인물이 자신의 대학 동기라는 사실을 말할 뿐이고, 그녀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빙의를 목격할 때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지영이 할머니를 연기하는 모습을 두고, 그것이 할머니임이 명백하지만 어머니는 그 사실을 거부하고 심지어 지영의 내면으로 추방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스크린으로부터 추방당한 지영의 모습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영화가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모습을 외면했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크린이 김지영이라는 현상을 타자화한다는 것, 그러니까 김지영 본인의 일차적 타자화와 스크린으로부터의 이차적 타자화를 겹쳐서 겪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이 영화가 스크린이라는 공간을 하나의 전시대로 사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때 전시대란 영화가 제안하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그 안에 대입될 무언가를 기다리는 상태다. 무대가 준비되고 배우가 들어오면 그는 김지영을 연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빙의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의 전제는 영화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화라는 무대에 직접 올라서게 되는 배역의 분배, 그 이입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이 무대에 지명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로부터의 부름을 받아 배역을 연기한 후에 다시금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자신에게 주어진 점수가 어떠한지를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의 순간은 지영의 주변인물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그곳에는 어떠한 판단이 도래하지 않는다. 내가 주변인물에게 부여한 영혼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며, 그렇게 벽으로 존재하는 타자가 벽으로만 존재하지 아니하고 나를 감싸는 무언가가 될 때 김지영의 모습은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개입하게 된다. 김지영이라는 현상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벽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타자를 지영의 마음으로 불러들이는 본작의 서사에서 그들은 지영을 감싸는 무언가가 된다. 지영의 어머니는 지영을 알아주지 못했다면서 울분을 토하고 지영의 남편 또한 그렇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건 지영 스스로가 자신의 빙의 증상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녀가 정신과 클리닉에 다가설 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과 치료에서 가장 어려운 게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몸을 클리닉에 데려놓는 것이라고 말하며 육체와 영혼의 합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지영이 겪는 간혈적 빙의 증세를 반대로 보아 ‘유체이탈’이라고 가정할 때, 그녀에게 쉴 새 없이 투입되는 건 영화가 끌어오는 ‘너와 우리’이며 그것은 바로 여성들의 연대를 영화 외부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사 안에서 이상하리만치 타자로 존재하는 주변인물, 그런데 필요할 때마다 요구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어쩌면 기생 숙주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이야기는 확실히 희극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지영의 시선을 보여주고 그에 확답을 받으려는 영화적 이동의 소산이겠지만 그 활용방식이 어째 이상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이 지영의 갑갑한 마음을 보여주려는 영화의 기술방법일 수도 있다. 영화는 김지영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 의도적인 정보 제한을 했을 수도 있고 그것이 관객에게 효과적인 화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려진 정보가 외부 세계로의 연대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몇몇 관객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실체, 내부로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도와야만 하는 이상한 상황으로 오인하게 한다. 허나 이것이 완벽한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은 영화가 전적으로 지영을 밀어주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영화가 현실 세계의 문제를 무대 위에 올림으로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려는 일종의 풍자극으로 기능할 때, 그 풍자극의 주체는 지영이 아니라 카메라다. 그리고 이 카메라는 지영을 중거리에서 관찰하며 지영에게로 우리를 이입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약한 척력이 작용하고 그걸 감지한 몇몇 관객은 지영에 이입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척력이 없으니 인력이 일방적으로 작용하게 되고 그렇기에 지영을 둘러싼 주변인물의 모습이 바로 무대 위의 타자라는 점을 인지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무대 위라고 느낄 때, 그것이 단순히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전하려 한다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현실로부터 떨어진 이 공간에 그들이 감금되어 있다고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그런 감금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그들이 감금될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게 하고, 그런 맥락에서 지영은 단순히 정신병이 있고 그렇기에 사회로부터 분리된 어느 주체로만 보이게 된다. 이는 영화가 본래 의도하던 사안이 아니고 따라서 오독이지만, 그런 오독이 영화 바깥에서는 오독이 아닌 것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유발한다. 어쩌면 이게 영화에 표할 수 있는 약간의 아쉬움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아무쪼록 아쉬운 점인 것은 틀림없다. 원작을 보지 않더라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번안을 거친 이 영화는 자칫하면 자신의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부에 손을 내미는 형국으로 보일만한 구조적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무언가 왜곡이 쉽게 일어날 수 있겠다는 점을 제하더라도, 초심자의 행운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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