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머니>(2019)
정지영이 <블랙머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다음의 대사이다. “IMF가 다시 올 수도 있다”. 이 대사는 영화의 후반부에 짧게 지나가지만 영화가 시작하는 나레이션은 IMF라는 현실 사건에 대한 실제 뉴스 화면과 같은 팩트이다. 예컨대 이 영화는 작중의 상황을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전달하려 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사건과 인물은 거짓이라는 말이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예고가 갖는 파급력이다. IMF라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명령이니 말이다. 아니 말을 고쳐야겠다. 명령이 아니라 망령이다. 김병규가 <변호인>을 두고 쓴 글에서 문장 하나를 변용하자면, “IMF라는 망령이 우리 사회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전과 후가 접합되어 탄생한 이 문장을 두고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말해볼 수 있는데, IMF라는 망령과 그것이 어슬렁대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IMF라는 망령은 수많은 사람을 비극에 몰아넣은 구조조정이라는 서민사회의 붕괴와 국가부도라는 원천적인 몰락의 형태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그것이 어슬렁대는 현재는 IMF가 요구한 체질개선에 따른 여러 조치가 지금까지도 많은 폐단과 부작용을 낳는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진 때가 IMF 시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가장이 무척 많았던 때가 IMF 시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 되는 망령의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가 나지막이 암시하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성공적으로 접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블랙머니>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만듦새가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만듦새를 두고 영화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다. 소위 말하는 개성을 지우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알맹이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지영의 필모그래피에서 <부러진 화살>이 법정 위에 서는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IMF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엑소시스트의 예고를 전하려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예고를 하는 것에 필요한, 망령이라는 현상이 현존함에 대한 근거는 지금 우리 사회에 IMF라는 역사적 사건을 현상으로만 사용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감독의 개인적인 추론일 테다.
이 영화에서도 이경영 배우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타락하고 파괴적인 고위층 속물 연기로 유명한데, 그를 비롯한 여러 고위층이 외국계 투자 자본과 결탁하여 ‘국부유출 방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돈을 투자하는 모습은 그런 고위층의 세태를 비판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이 비판이 안착하는 지점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는 않았기에 합리적이라고 막연하게 옹호해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방향에 있는 곳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돈 많은 부자는 나쁘고 돈 없는 서민은 선량하다는 식의 이분법에 우리는 (우선은) 동의하게 된다. 사실 이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면 영화 자체가 굴러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그들이 교묘하게 설계한 사법회피의 과정처럼, 감독이 원하는 대로 서사를 끌고 가는 논의회피의 과정이다. (다만 영화는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점일 뿐이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건 티브이에서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뉴스 보도로 송출되는 것을 두고서 이경영을 비롯한 고위층들이 ‘쓸데없이 부자를 공격한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견인하는 하나의 논리 방어지점으로 기능하기도 하는데, 이 영화에서 고위층이 악의 세력으로 정의되는 게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라 경제를 통해 쌓은 권력으로 경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려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가 곧 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빌 게이츠나 록펠러 같은 대부호는 젊었을 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악마로 불리기도 했지만, 은퇴 후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40조를 기부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건 작중에서도 나오듯이 ‘금융자본주의’라는 ‘돈 놓고 돈 먹기’이다.
금융자본주의라는 것의 핵심은 신용이라고 한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나중에 돈을 배로 돌려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은행은 대출을 원하는 이에게 돈을 내어준다. 그래서 시중의 은행에는 수치상의 금고 보유액보다 실제 금고 보유액이 훨씬 적다. 그런 이유로 은행이 파산하면 예치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돈이 거의 없다. 예시를 이렇게 들었지만 2008년의 세계 대공황과 그에 파생된 2011년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와 1997년의 IMF 사태는 그 본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체 없이도 몸집을 불려 나가고, 현실의 사람에게 죽음과 같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들을 유령이 아닌 망령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자신의 논리에 살을 붙여가는 과정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가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게 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본가의 자녀로 태어나 자신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의 세력에 붙은 것처럼 나오는 김나리(이하늬)라는 캐릭터가 일시적으로 검사 편에 붙는 듯 보였다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이 결말은 우리가 몸담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 어떻게든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영화가 어떻게든 결말지점을 거대한 금융자본주의 사회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예컨대 영화는 무리를 했다. 우리를 망령이 존재하는 실제 사회로 옮겨두려고 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블랙머니>라는 영화 한 편의 전후에 자리한 것들이 본편이 설정한 논의에 지점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조커>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뉴스에 보도되는 카메라의 구도나 시위의 성격이 2011년의 월 스트리트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이 점은 누구나 느꼈을 테지만 시기나 배경으로 명확하게 거리가 있기에 섣불리 지적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1980년대라는 시기와 고담시라는 가상의 공간은 설사 그 시위의 성격이 상류층에 대한 반발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2011년의 월스트리트와 공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월가를 점령하라’라는 사건을 현상으로 바꾸어 일종의 시그널로 치환하면, 이 논의는 변화국면을 맞이한다.
<조커>의 사건은 폭동이다. 가상의 사건이기에 부담 없이 붙일 수 있는 이 이름의 다른 표현은 ‘폭력적 시위’이다. 평화 시위가 폭력 시위로 변하게 되면 본질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폭력은 어떻게 해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건데, 여기서 우리는 폭동이라는 이름이 일종의 사건으로서 티브이 뉴스 안에 다루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고담시의 언론은 지배계층의 의견을 대리하는 타락한 발성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들은 소요 사태에 대한 발단을 지적하기보단 전개와 (가상의) 결과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 티브이라는 매체에는 어떠한 근본이라던가 하는 원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티브이라는 매체에 현혹된 일반 대중은 유령처럼 다가온 그것이 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눈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점만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우리가 유령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유령이 일반적이지 않고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체를 규명할 수 없는 이 현상에 대해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이다. 누군가가 그를 무찔러주기를 원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식으로 그를 회피하거나, 아니면 유령을 보고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면서 애써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령을 목격한 이에게는 유령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그건 실체가 있다. 다만 그것을 두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려면 유령을 보았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는 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과 비슷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려는 건 실체를 규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징조는 사건에 대한 불길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근래에 개봉한 영화 중에 IMF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이 있는데, 이 영화는 재앙이 찾아온 그날을 디데이로 설정해두고 예견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예고된 결말이기에 지루함을 느낄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죽음의 정확한 날짜가 선고되었기에 불안에 떨며 비탄이나 긴장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여기서 IMF라는 거대한 사건을 두고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교회에 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기에 더욱 불안한 것인데,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기에 불안한 처지에 놓여있고, 이런 점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난에 대한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조커>를 보면서 아서 플렉(호아퀸 피닉스)의 조현병이 언젠가는 일을 저지르리라는 점을 예견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테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확실하게 예견된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때 불확실성에 대한 불확실을 피하려는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재앙의 징조를 애써 무시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이는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를 직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결과는 아서 플렉과 같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궁지에 몰린 이들을 방치하던 고담시에 대가를 안겨준 것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맥락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벌새>에서도 은유적으로 언급되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의 본질이 안전불감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중에서 주인공 소녀 은희(박지후)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시달리는데, 이것이 사춘기 시기의 또래가 겪는 불안감이거나 집안 내 폭력에 대한 무기력함의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감정 (사랑을 포함한)에 시달리는 은희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위화감을 동반한 몇몇 사건’들이 모두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최근으로부터 언급하면 세월호 사건이 있고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으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있다. 이때 우리 모두가 아는 이 사건이 유독 다른 사건보다 비탄을 불러일으킨 것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는 ‘안전불감증’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만 해도 붕괴가 이루어지기 며칠 전부터 천장이 갈라졌는데 그런 위화감에 대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세월호 사건에서의 언론은 현장의 소식과는 다른 목소리를 전하면서 이상하게 싸늘한 위화감을 가장 처음으로 전했고, 사고 소식이 전달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탑승자 전원 생존 소식이 <국가부도의 날>에서 나오는 “IMF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발표와 유사하게 들린다면 이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 일들에 대한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말이 나온다. 두 번째,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고 발언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세 번째, 사람들이 공론장으로 나와 진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 절차에 대해 다양한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절차를 밟지 않기 위해 준비되는 물밑의 공작이다. 분명하게도 위험에 빠진 상황이고 그래서 미리 경고하려는데 누군가는 그걸 두고 설레발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범주인데 그 반대쪽으로도 공작은 존재한다.
우리가 이전에 겪었던 일로 ‘안전불감증이라는 망령’을 목격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 안전불감증이라는 것의 실체는 없으며 지금 우리가 보는 게 안전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 발언은 ‘서울은 안전하다’는 6·25 전쟁 시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말을 거쳐 ‘탑승자 전원을 구조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을 거쳐 현재의 우리가 보는 이 영화에 도달한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IMF가 다시 올 수 있다.”라는 발언은 그런 금융자본의 재앙이 다시 올 수 있다는 ‘안전불감증’에 대한 역설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직접적으로 사망 사고를 낸 무언가는 아니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중요하다.
세월호 사건이 대통령 탄핵의 가장 큰 원인이 된 이유는 국민에게 주어야 할 마땅한 신뢰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우스갯소리로 언급되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발언도 마땅한 신뢰를 주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여기에 <블랙머니>에서는 “이래서 검찰이 아니라 견(犬)찰 소리를 듣는 거다.”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덧붙여서 주인공 양민혁(조진웅)의 친구는 “인권 변호사인 내가 탈세 혐의로 잡혀가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라고 말하는데, 이것 또한 변호사 능력이 아닌 일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양민혁 본인이 자신이 조사하는 피의자를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하는데, 본인도 이게 검사로서의 신뢰를 갉아먹는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영화에는 금융계 자본의 음모로 사망한 인물의 장례식에 금융계 자본 쪽 변호사(이하늬)가 참석했다가 몰매를 맞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노동계 인사들에게 주인공이 지나가는 말로 “밤에 뭐 몰래 먹겠지.”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신뢰의 문제다.
위의 대사에는 전후로 작용하는 피드백 대사가 각각 있다. “그럼에도 유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러 왔어요.’라는 말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래도 뭐는 먹고 해야지”라는 말하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발언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정지영이 영화에서 설정한 핵심 문장만큼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마침 프로듀스 101 사건이라는 청춘 기만극이 등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감독이 영화로 관객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그것도 실패한 신뢰주기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한해를 돌아보는 징검다리로써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