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2020)
1.
인터넷상의 여론이 현실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론장으로 여겨지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터넷 공간에 모인 이들이 현실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촉발된 ‘아랍의 봄’이나 2016년 한국에서의 촛불시위와 같은 사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이 파생되었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깨부수고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견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한석규가 열연했던 오래된 영화 <접속>의 시대가 디지털에 대한 개척 정신을 말 그대로의 개척으로 여겼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변화라 할 수 있는데,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할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현대에는 정말로 사람이 아닌 것들이 사람인 척하거나 또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글이라는 촉각의 시대로부터 영상이라는 시각의 시대에 도착한 우리에게, 본다는 게 곧 거리를 두는 행위가 아니라 ‘만난다’는 유사한 형태로서의 촉각으로 변화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가 물질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디지털은 비물질성을 특성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견인하게 된 시대에는 비물질적인 것이 곧 물질적인 것으로도 취급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이것이 바로 시각이 촉각의 역할을 어느 정도 겸하게 된 이유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시각이라는 게 주체와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그 사이의 간극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그렇게 여겨지고, 그렇기에 주체는 곧 ‘만난다’는 형식으로 대상과 접촉하게 되는 셈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2010년에서 2019년까지 10년을 관통해온 혐오라는 문화적 코드이다. 헬조선, 맘충, 틀딱, 한남, 메갈, 이와 같은 여러 대상에 대한 혐오가 최초로 발원한 지점이 분명하게도 부정적 감정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와 같은 용어들이 인터넷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이 그들이 단지 인터넷상으로만 존재하는, 디지털의 특성인 비물질성을 담지하고 있기에, 현실이라는 물질 안으로는 개입할 수 없으리라고 믿어왔던 우리에게 그런 개입을 허용했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는 위에서 언급한 감각 수용 방식 변화의 맥락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사료된다. 본다는 게 곧 만진다는 감각과 유사하게 된 현재 상황에서는,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인 인터넷 매체는 (마치 고양이 카페 안의 고양이처럼) 우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만져댄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예컨대 인터넷상에서의 혐오라는 것은 촉각에 대한 과부하 및 거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촉각에 대한 그런 거부감이 그것을 문화적 코드라고 여기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혐오라는 것을 문화적 코드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어쩌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혐오라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발원지가 어떠하든 간에 목격이라는 시각적 행위, 비물질적인 행위에서 물질성이 파생된다는 것은 혐오라는 시각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이 바로 물질성을 담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런 맥락에서는 우리가 혐오를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손으로 ‘만진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같은 이유로 그런 촉각에 익숙해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액체 괴물(우리가 마주한 혐오는 마땅히 단단한 존재가 아니기에)’을 만지듯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은 그것을 액체의 괴물화와 괴물의 액체화 둘 중 하나로 딱 잘라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혐오가 디지털화된 것인지 디지털로 인해 혐오가 생겨난 것인지를 명확히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액체 괴물을 대하는 방식은 액체 괴물에 대한 접촉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촉각이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을 때와는 달리 만지는 것으로 믿는다는 촉각적 놀이의 방식이 된다.
2.
나는 너를 보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다, 는 관음의 형태는 트위치와 같은 스트리밍 방송에서 시청자들이 방송자에게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방송이 방송자가 시청자와 명확하게 분리되어 시간적으로 고정적 분리를 겪었던, 마치 미술관 벽에 걸린 회화와 같은 매체였다면, 근래의 인터넷 방송은 방송자가 시청자를 의식하지 않는 척해야 했던 연극이라는 매체와도 다르게 무수한 관음으로부터 자신을 허용하는 쓰다듬기의 허용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는 볼 수 있기에 권력을 획득하는 정신분석학적인 시각의 폭력에 의거하는 게 아니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하듯이, 상자 안의 양 또한 분명하게도 존재하는 대상이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여우를 매만짐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촉각적인 인정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판옵티콘이 권력의 감시를 말한다면, 스트리밍 방송에서의 권력은 다수 간수의 소수 정치에 의하는 것일 테다. 쉽게 말해 스트리밍 방송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곧 죽음의 형태이다,)
그래서 나는 혐오를 촉각을 다루는 다양한 형태의 방식을 망라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불쾌(언캐니)와는 다르게 디지털 시대의 혐오는 본다는 것이 아닌 ‘만졌다’는 인식에 의한다. 이를테면 몰래카메라라는 행위가 디지털 시대에 어떠한 혐오감을 당사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단순히 보여졌다는 것이 아니라 ‘만져졌다’는 인식 때문이다. 단순히 보여졌다는 것만으로는 이미 인터넷 공간에 진입한 이상 자기 자신을 그러한 보여줌 안으로 들어가게 한 우리가 그런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어느 상점과 같은 곳에 갔을 때 직원으로부터 받는 과잉 친절을 경계하게 된다. 우리는 가게라는 물건 판매의 공간으로 진입하기를 스스로 택했지만 그곳으로부터 보여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 쓰다듬는 것으로의 시선만이 이 물질적인 공간에서 우리를 동화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비물질적 물질인 익명(anonymous)이 되고 싶어 한다.
3.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는 모두 익명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이 인터넷과 현실에서의 태도 차이를 부른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자신이 특정 당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이 물질로부터 파생되는 비물질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내지만, 현실 공간에서는 세계로부터 자신이 포착당한다는 강한 의심이 물질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현실 공간에서 우리는 세계를 지지하는 하나의 물리적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그에 부합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는 내가 만지는 것이 곧 물질이 된다는 비물질의 물질화, 미다스의 손을 뻗으려 한다. 물론 우리라는 이름의 미다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치가 될 수 있다는 물화의 개념이 아니다. 익명으로 위장한 상대에게 다가가 장막을 걷어내어 그에게 목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사실의 전파, 속삭임이 바로 혐오의 표현이다.
우리는 사물과 대상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 고지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는 그동안 수면 아래로 잠겨있던 것들이 물 위로 올라와 육지의 우리가 매만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혐오의 시대에 재발견되는 여러 불편함의 현상들은 티브이와 영화와 같은 전통적 매체에서 벗어난 우리가 인터넷과 같은 공간에 부유하는 것들을 뜰채로 건져 올리는 것에서 귀인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을 재발견하는 게 아니다. 영상이라는 매체가 발현하는 방사능과 같은 기운이 사실은 물질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과학으로의 증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풍향계가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그게 어디에서 흘러오는지는 몰랐던 우리가 일기예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영상을 붙여주듯 말이다.
이는 인터넷이 현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고 그렇기에 그런 모습을 신뢰할 수 없다고 믿어 왔던 우리가 인터넷 또한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되었음을 인정하게 될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니 이는 어떤 면에서 꽤나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을 만한 부분일 테다. 과거의 역사가 기록가가 기록한 역사이고 그 안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익명으로 남았지만, 현대의 역사는 그런 익명이 현상에 대한 인식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한 획을 그으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남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나간 과거에 대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서 비물질화 된 물질을 액체 괴물로 규정하고는 괴물의 액체화, 또는 액체의 괴물화 둘 중 하나로 여기면서 양측 진영을 향해 첨예하게 대립한다.
4.
역사를 다룬 작품을 볼 때면 그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본디 누군가의 시각으로 기록된 매체이지만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는 건 시각이 아닌 촉각에 의해서이다. 가상 현실이나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매체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역사적 현장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이 뻗은 나뭇가지는 역사 안으로 뿌리를 내는 방식으로 뿌리와 나뭇가지의 체계를 역전시킨다. 다르게 표현하면 현재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우리에게 그런 과거가 다시금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때 나무라는 기관에 사용하는 여러 은유의 형식을 빌려 오자면, 우리는 손을 뻗은 곳을 통해 손을 뻗은 곳으로 손을 뻗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디지털 시대의 역사 해석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들려주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과거의 입장으로 과거를 바라보려던 시도는 이제, 상상된 과거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에게로 상상을 되돌려주는 게 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변화가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분명하다. 본래 역사에 대한 해석이라는 게 상상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는 표현될 수 있기는 해도, 시공간으로 렌더링 된 역사라는 상상 안에서 간과되어 왔던 익명이라는 이름의 물질을 우리가 손에 쥐게 될 때는 그것이 미다스의 손길처럼 황금이라는 이름의 탐욕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다. 익명이라는 이름의 대중이 그저 응시당하기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 손을 뻗는 것으로 취득되는 개념으로 취급되기만 할 때 역사의 해석에 대한 불행의 전주는 시작된다.
더욱이 현재 시점으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이야기라면 그런 전주의 끝을 보기란 쉬운 일이다. 어린 왕자가 양을 담은 상자를 그렸을 때 우리는 양이라는 거대한 익명적 개인을 자유로이 감당할 수 있었다. 코끼리가 보아 뱀을 삼키는 방식으로 구현된 역사라는 사물에 대한 삼켜짐 또한 우리는 (기발하다거나 끔찍하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관 안에 갇힌 장미를 관찰하던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다가와 쓰다듬의 행위를 요청했을 때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은 촉각으로 맺어진다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게 되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자신을 길들임으로써 자신은 세상 모든 여우 중에 어린 왕자라는 단 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린 왕자에게 만질 수 있다는 행위 자체가 여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행로를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그걸 만졌다는 사실이 곧 보았다는 것으로 생각되면서 역사라는 ‘더는 볼 수 없는’ 현장을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보았던’ 풍경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예를 참조하려 한다.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이 인터넷상에서 유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발단이 어떠했든 간에 지금의 인터넷 문화는 해당 문장의 앞뒤 맥락을 희미하게 해두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일종의 수사어로 사용하게 된 것은 ‘각하’라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대국적으로’라는 단어가 그 뒤에 따라오는 ‘암살’이라는 행동과 연결되기 때문인데, 이는 인터넷 문화에서 ‘아오지 탄광’이라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북한’이라는 지역적 맥락보다는 정치범 수용소라는 맥락과 유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현실 역사는 역사적 사실로 남겨지는 반면에 정작 역사적 사실로 남은 것들은 촉각적 쾌락을 위한 유희 도구가 되어버린다.
5.
역사적 사실이 꼭 현실을 견인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게 단순한 유희 도구로만 변모해버리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왜곡된 역사라는 객관성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시선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하는 촉각의 지각적 경계를 딱 잘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마리의 여우와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여우의 외견을 한 다른 개체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가 없듯이, 손을 뻗어 만지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우리에게 만져지는 것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구전에서 글로, 글에서 영상으로 옮겨진 이 작품은 청각-촉각-시각이라는 세 차례의 과정을 거쳤기에 그러하다. 그런데 익명의 제보자들로부터 파생된 글을 다룬 이 영화에서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는 영화 도입부의 문구이다. 말하자면 촉각적 지각을 시각 지각으로 번안한 이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로 하여금 촉각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의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어떻게 촉각적 지각을 만들어내느냐가 아니라 역사를 촉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무엇을 얻거나 놓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데 <남산의 부장들>은 그 자신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논픽션이라는 말로 도입부를 열면서도 영화의 마무리는 전두환의 실제 사진, (아직 살아있기에 더욱) 현실 역사에서 존재하는 인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설정했던 허구의 세계를 현실 역사로 옮겨오기를 유도한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일어나는 큰 줄기의 이야기가 대통령의 비자금을 융통하는 어떤 개인이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영화에서 박부장(곽도원)이 김부장(이병헌)에게 알려준 그러한 사실은 영화 전반에 걸쳐 김부장에게 1인자에 대한 의심과 그를 둘러싼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심어놓으며, 그렇게 흔들린 김부장의 모습은 총기 발사라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영화는 그런 김부장의 선택에 대의를 심어주기 위해 경호실장(이희준)과 대통령 사이의 유대 관계와 그곳으로부터 배제되어 가는 김부장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러한 시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초반부터 은연중에 ‘전두환’처럼 보이는 어떤 인물이 사실은 정말로 전두환이라는 실존 인물로 변모함으로써 가상의 역사와 실제 역사 간에 에너지적인 흐름의 길을 터놓아버린다.
6.
영화는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거사가 진행될 때 김부장이 바닥에 묻은 피에 잠시 발을 접질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자기 스스로를 주관성으로부터 내쳐버린다. 이 영화에서 권력이라는 게 말 한마디, 손짓 한번, 매서운 눈초리와 같은 철의 야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인물 간의 관계는 촉각이라는 가장 근대적인 방법으로 구성되고 있을 텐데, 그러한 촉각으로 영화 전체를 어루만지던 영화는 ‘미끄러짐’이라는 물리적 수단을 통해 김부장을 비롯한 관객을 잠시나마 촉각에서 시각의 세계로 끌고 가버린다. 즉 김부장이 바닥에 쏟아진 피에 미끄러질 뻔했다가 균형을 다시 잡는 상황에서 피에 젖은 양말을 응시하는 김부장의 시선은, 김부장에 동화되어 영화를 보던 관객 또한 사실은 이곳이 촉각이 아닌 시각의 장소라는 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터넷 시대의 우리가 그러하듯이 비물리적인 것이 물리성으로 옮겨가게 될 때 벌어지는 일,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구전으로 전해 들은 상태의 우리에게 그게 정말로 겪은 일처럼 묘사되는 것을 경계한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허나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그것과는 관계가 없는 다른 측면의 맥락으로 의미를 전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남산의 부장이 아니라 ‘부장들’이라는 다수표현을 사용한 건 영화에 나오는 박부장과 김부장을 일컬어 칭하기 위함, 더 나아가서는 남산의 ‘부장들’이 아니라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말로써 살아남는 것은 인간 개인이 아니라 그것이 몸담은 제도, 국가, 기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남산이라는 장소가 인간 개인 존재, 현대 한국을 초월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대통령이 곧 국가”라는 경호실장의 말은, 남산이 곧 서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현대 한국에서 남산과 대통령 사이에 의미적인 고리를 연결하고, 영화 중반에 굳이 없어도 될 대통령과 박부장의 일본어 건배사는 해당 대통령의 현실 모티브인 박정희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일본이라는 나라와의 의미적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가 그러한 미끄러짐을 통해 우리가 현실에 손을 대어 읽어내는 감각인 촉각으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키는 자구책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7.
촉각이라는 주관성, 혹은 근대성이 시각이라는 객관성으로 옮겨가고자 할 때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시각이 촉각을 겸하는 상황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영화가 논픽션에 기대어 만든 논픽션 매체라는 사실에 기대어 자신이 전하려는 현실의 상황에 손을 뻗으려 하는 이유는 근래의 사람들이 촉각은 더는 근대성의 가치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시각이 겸업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가 무언가를 바라봄으로써 정보를 얻는 시대였다면 지금 시대는 무언가를 만짐으로써 정보를 몸으로 취득하는 시대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곳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에 자연스레 홀리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그 무언가에 홀린다는 이끌림의 신호가 아니라 ‘보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만졌기에 믿는다’고 생각하게 된 우리 문화의 풍토이다.
거짓된 것, 그릇된 것, 가상의 것들이 판치는 세상이기에 시각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어린 왕자의 양이 아니라 어린 왕자와 여우의 관계에 빗대어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어린 왕자가 그린 상자 안에서 양은 정말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걸 시각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섣불리 믿을 수 없어 한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손을 뻗어 상자 안의 양을 만져보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가 손을 뻗어 보아도 매만지는 건 단지 종이의 질감뿐이다. 이후에 어린 왕자는 자신이 떠나온 별에 있는 장미에게 투명한 유리관을 씌움으로써 더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지구에 있는 무수한 장미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별에 있는 투명한 관 안의 장미는 ‘시각으로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점을 스스로 확인한다. 이윽고 마침내, 어린 왕자는 자기 스스로 장미에게 씌운 관을 통해 가시가 없음에도 만질 수 없는 것과 가시가 있기에 만질 수 없다는 건 명백히 다른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기록된 역사와 내가 받아들인 역사라는 두 개의 감각이 시각과 촉각이라는 두 개의 대분류를 구성한다면 ‘교과서로 알 수 있지만 실제로 확인할 수는 없는 역사’에 대해 투명한 관 안의 장미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라는 대상은 우리가 가까워지려 했지만 사실은 그 별에만 하나 있기에 특별한 존재였을 뿐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예컨대 어린 왕자는 행성에 하나 남은 장미에게 유리관을 씌워줌으로써 자신의 촉각을 장미로부터 미끄러지게 하고, 그에 수반하여 지구에서 겪었던 여우와의 따스한 손짓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남산의 부장들>에서 떠올린 것들이 과연 현실 역사에 대한 시각인지 아니면 현실의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촉각을 빌려 오는 행위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시대가 디지털로 변화하면서 정보 접근성이 높아진 우리가 정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보다는 그에 손을 뻗어 길들임, ‘특별한’ 관계가 되려 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물질은)는 실존하는가.